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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소각 없는 자사주 매입이란 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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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지난 3일 KT&G가 3000억원(약 347만주) 규모의 자사주 매입과 소각 방침을 공시했다. 향후 3개월 이내에 자기주식을 취득해 매입 완료 후 즉시 전량 소각한다는 것이다. 2009년 이후 14년 만의 자사주 소각이다. KT&G 발행 주식 수의 2.5%에 해당한다. 앞서 JB금융지주는 지난달 26일 컨퍼런스콜에서 3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방안을 밝혔다.

 이들 기업의 자사주 매입·소각 행보는 뜨거웠던 지난 3월 주주총회의 산물이다. 주주가치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 등을 주장하는 행동주의 펀드의 캠페인이 본격화하며, ‘창(행동주의 펀드)’과 ‘방패(기업)’의 싸움은 치열했다. 표 대결에서 밀린 상당수의 행동주의 펀드는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날 선 창의 공세에 하마터면 방패가 뚫릴 뻔했던 기업이 주주 친화 정책으로 한 발짝 다가선 것이다.

 자사주 매입과 소각에 나서는 국내 기업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SKT는 3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한 뒤 2000억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하기로 지난달 26일 결정했다. 이날 종가 기준 종가 기준 총 발행주식수의 2%에 해당한다.

 자사주 매입은 자기 회사 주식을 회삿돈으로 사들이는 것이다. 배당과 함께 대표적인 주주환원 정책으로 꼽힌다. 기업 가치는 그대로인데 시장에 유통되는 주식 수가 줄어드는 만큼, 기존 주주가 보유한 주식 가치가 올라가는 효과를 낳는다. 주주환원 항목에서 여전히 척박한 한국에서 자사주 매입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실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제대로 된 주주환원을 위해서는 자사주 소각이 이뤄져야 한다. 소각(消却)이란 말 그대로 ‘모두 없애버리는 것’인 만큼, 사들인 자사주를 소각해야 총 발행주식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 주주의 손에 있던 주식을 회사가 사들이는 자사주 매입은 주식의 소유권이 회사로 넘어오는 것일 뿐이다.

 자사주 매입으로 유통주식 수를 줄일 수 있지만, 그 또한 자기 주식을 사들인 회사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다. 성과급 개념으로 임직원에게 나눠준 자사주를 임직원들이 팔거나, 배당 등으로 주주가 받아야 할 돈으로 사들인 자사주를 다른 목적으로 처분하면 시장에 이들 물량이 다시 풀리는 만큼 유통주식 수를 줄인다는 당초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주주환원이란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주주에게 이익 돌려줘야" 명분  
인적분할 등 ‘자사주 마법’ 발휘
대주주 지배권 강화 '꼼수' 우려

 게다가 통상적으로 ‘자사주 매입=자사주 소각’이란 등식이 성립하는 미국과 달리 자사주 매입이 소각으로 모두 이어지지 않는 한국에서 자사주 매입은 주주가치 제고와 환원이 아닌 ‘대주주 가치 제고’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자사주의 마법’이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다. 하지만 인적분할을 이용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인적분할은 기존 주주가 지분율에 따라 새 회사의 주식을 똑같이 나눠 갖도록 기업을 나누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사주를 보유한 대주주가 신설회사의 신주를 배정받으며 의결권이 살아난다. 대주주 지배력이 커지게 된다. 지난 5월 OCI와 OCI홀딩스의 인적분할이 이런 사례로 여겨져 주가 하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제3자 매각시 의결권이 살아나는 점을 활용해 계열사나 다른 회사와 ‘자사주 맞교환’을 하고, 이를 통해 ‘백기사’ 등 우호 세력을 확보해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자사주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낮은 자사주 소각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지적된다. 기업공개(IPO)와 증자 등으로 주식 시장의 유통주식 수는 계속 늘어나지만 자사주 소각이 이뤄지지 않아 시가총액 증가가 주가지수 상승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낮은 배당 성향에다 자사주 소각에 인색한 기업으로 인해 ‘(한)국장’의 매력 떨어진다는 투자자의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자사주 소각에 대한 거부감도 만만치 않다. 기업은 마땅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는 한국적 상황에서 자사주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기업의 중장기 혁신 역량과 경쟁력 강화, 일자리 창출 등에 필요한 투자 대신 주주환원에 기업 이익을 몰아주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건전한 자본시장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자사주 소각 등을 통해 투자자에게 기업의 이익이 돌아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유인이 없는 주식시장에서 장기 투자는 어불성설이다. 수익 추구를 위한 특정 종목으로의 쏠림 현상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주주에게 인색한 시장은 결국 제로섬 게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