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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독사과로 죽이려 했다…스파이 오명 '원폭 아버지' 기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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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의 저명한 핵물리학자다. 영화계 거장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그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오펜하이머'를 제작했다. AP=연합뉴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의 저명한 핵물리학자다. 영화계 거장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그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오펜하이머'를 제작했다. AP=연합뉴스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영화를 만들어온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3년 만의 신작으로 역사 속 핵물리학자가 재조명 받고 있다. 영화는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에서 개봉한 '오펜하이머'. 컴퓨터 그래픽(CG) 없이 원자폭탄 폭발 장면을 재현한 데다, 킬리언 머피,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정상급 배우 등이 대거 출연하면서 개봉 전부터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더불어 주인공인 실존 인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67)의 삶도 이목을 끌고 있다. CNN은 "2차 세계대전을 끝낼 열쇠를 쥐었던 인물이자, 전쟁에 희생된 인물"이라고 소개했고, 뉴욕타임스(NYT)는 "한때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과학계 순교자가 된 인물"이라고 평했다.

①70년 만에 벗은 소련 스파이 오명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인근에서 시행된 인류 첫 원자폭탄 폭발 실험 '트리니티'의 모습. AP=연합뉴스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인근에서 시행된 인류 첫 원자폭탄 폭발 실험 '트리니티'의 모습. AP=연합뉴스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처음으로 원자 폭탄을 완성한 인물이어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뒤인 42년, 미국은 독일에 대항할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에 착수했다. 당시 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했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개발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엔리코 페르미, 에드윈 맥밀런 등 노벨 수상자들이 대거 참여했지만, 오펜하이머가 책임자로 발탁됐다. CNN에 따르면,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 미 육군 장군이 오펜하이머의 천재성과 정치에 취약한 면 등을 이유로 들며 강력히 추천했다고 한다. CNN은 "오펜하이머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전했다.

약 3년 뒤인 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의 사막 한가운데서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프로젝트'가 이뤄졌다. 인류 역사상 첫 원자 폭탄이 탄생한 순간,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속 문구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제 나는 세상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몇몇 사람은 울었고, 몇몇은 웃었고, 대부분은 침묵했다"며 "우리는 앞으로 세상이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다"고 회고했다.

미국의 과학자 등이 첫 원자폭탄 실험인 '트리니티'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미국의 과학자 등이 첫 원자폭탄 실험인 '트리니티'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원자폭탄은 일본 나가사키·히로시마에 떨어졌다. 그 결과 일본이 항복하며 전쟁은 끝났지만, 수 만명이 희생됐다. 미 정부는 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나섰지만, 오펜하이머는 인류에 또 다른 위협이 될 것이란 생각에 거부했다. 이후 국제 사회가 냉전 국면에 접어들면서, 그는 '소련 스파이'로 몰렸다. 독일계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30년대 스페인 내전 당시 반파시스트를 지지하는 이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 사실이 그의 혐의를 공고히 했다. 결국 그는 미국의 기밀문서를 취급하는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다.

그가 스파이라는 오명을 벗은 건 지난해다. 제니퍼 그랜홈 미 에너지부 장관은 성명에서 "그가 겪었던 편견과 불공정, 그리고 애국심과 충성심에 대한 증거가 발견됐다"며 기밀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조치를 취소했다.

②아인슈타인과 시대 함께한 블랙홀 연구자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과 블랙홀 이론의 초기 연구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도 평가된다. AP=연합뉴스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과 블랙홀 이론의 초기 연구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도 평가된다. AP=연합뉴스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핵물리학자로서 이름을 알렸지만, 그는 양자역학과 블랙홀 이론의 초기 연구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도 평가된다. 17일(현지시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와의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캐시디 호프스트라대 교수는 "아인슈타인만큼은 아니지만, 블랙홀 분야에 있어선 노벨상을 받을 수준의 연구를 했다"고 말했다. 캐시디 교수는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책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아메리칸 센추리』의 저자이기도 하다.

39년 오펜하이머는 별이 붕괴해 블랙홀을 만든다는 연구를 처음 발표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그의 연구는 묻히는 듯했지만, 60년대 물리학자들이 블랙홀 연구를 재개하면서 그의 논문을 수차례 인용했다.

③살인미수 전과 있는 괴짜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배우 킬리언 머피가 주인공을 맡았다. 사진 유니버셜 스튜디오 제공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배우 킬리언 머피가 주인공을 맡았다. 사진 유니버셜 스튜디오 제공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대학 시절 신경쇠약과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하버드대에서 케임브리지대로 적을 옮긴 뒤엔, 자신을 무시하는 지도 교수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는 교수를 독살하기 위해 책상에 독사과를 두기까지 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대학 관계자가 사과를 발견하면서 살인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후 오펜하이머의 부모는 아들이 정신분석 치료를 받게 했다고 한다.

이후 독일 괴팅겐대에 진학했지만, 기행은 계속됐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든다며 교수를 교단에서 끌어 내리고 직접 수업을 하기도 했다. WP는 "오펜하이머는 괴팍한 콤플렉스를 가진 매혹적인 인물이면서, 20세기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열망과 불안의 화신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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