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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과주말을] 시가 그림 되고, 소설이 조각품 되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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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그림, 문학을 그리다

김선두 외 지음

176쪽, 1만5000원, 종이나라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숨을 쉬지도 않았지만/죽지는 않았다//(중략)//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감은 눈 번쩍 떴다/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2006년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김혜순씨의 시 '모래 여자'다. 한 여자의 미라를 통해 여성의 삶을 돌아봤다. 여자의 남자는 전장에서 죽었지만 여자는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 여성의 생명력에 대한 은유다. 화가 정정엽씨가 '모래 여자'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어두운 밤하늘에 날카로운 초승달이 떠 있고, 모래밭 같은 땅에선 여자의 가랑이 비슷한 형체가 붉게 타오르고 있다. 청색 계통의 차가운 세상을 발갛게 물들이는 '태초의 여성'이랄까.

한국화가 김선두씨는 소설가 이청준씨와 만났다. 소설가의 단편 '까마득한 선율'에 영감을 얻은 화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숲으로 날아든 참새떼에서 이념에 짓눌려온 한국인을 읽어냈다. 인간보다 이념을 앞세워온 우리 사회에 대한 풍자다.

우리 화단과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모였다. 김병종.박항률.박불똥.윤석남 등 화가 33명이 고은.김지하.황석영.김훈 등 문인 42명의 시와 소설에 그림을 입혔다. 한국화.서양화.조각 등 다양한 미술 장르와 우리 시대의 고민이 농축된 문학의 만남이 아름답다. 힘겨운 세상을 살맛나는 일터로 만드는 예술에서 회화와 문자의 구분은 무의미하리라. 책에 실린 그림 99점을 감상하는 전시회도 내년 1월 15일까지 서울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열린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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