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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상현의 과학 산책

몰입의 지평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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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내가 존경하는 한 영국 수학자의 이야기이다. 1980년대, 떠오르는 스타였던 이 분을 미국으로 모셔 오기 위해 텍사스대의 친구 수학자가 오래 공을 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분의 마음을 움직여 텍사스대 학장과 면담을 성사시킨다. 그런데, 이 분의 눈부신 성취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학장은 비위를 맞춰주기는커녕 오히려 면담을 면접으로 만들었다.

“우리 학교의 평판을 올리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발표하신 논문의 수가 너무 적네요.” 예상치 못한 추궁에 이 영국 수학자는 오전 내내 무표정한 채 함구하였다. 예상치 못한 무례에 너무 미안했던 텍사스대 친구 수학자는 안절부절. 점심을 먹으러 가서야 조심스레 물었다. “이봐, 괜찮은 거야?” 오랜 정적 끝에 영국 수학자가 입을 떼었다. “음… 그래서, 다발 구조를 가지는 매듭 공간을 한번 생각해보자고.”

kim.jee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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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의 근시안적인 잔소리를 아예 듣지도 않았던 그는 전혀 불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수학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아침의 침묵은 단지 몰입의 시간이었을 뿐. 홀대받았다는 것조차 아마 깨닫지 못했을 그는 텍사스 대학의 정교수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긴 강의록은 이후 기하위상 대학원생의 필독서가 됐고, 그의 연구는 수학사의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창의성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몰입의 순간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나를 막는 장애물이 뚜렷이 보이고, 이를 넘어서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과 한계가 마음속에 차분히 정리되는 느낌. 어둠이 차츰 걷혀가며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 연무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 갈망만으로는 오지 않는 마음의 상태.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 때, 시공간의 작은 블랙홀처럼 생각의 모든 에너지가 한 곳에 모이는 값진 경험을 하고는 한다. 이런 날은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는 흡족함으로 퇴근할 수 있는 날이다.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