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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한글' 파일 보낸 공무원…"이민을 은혜베푼다 생각" [이제는 이민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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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달 17일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인력 송출업체 VINA JSC에서 교육생들이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다. 하노이=이태윤 기자

지난달 17일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인력 송출업체 VINA JSC에서 교육생들이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다. 하노이=이태윤 기자

“도스레바 이이 데스까?(어떻게 하면 됩니까?)”

“미즈 돗데 쿠다사이.(물 좀 주세요)”

지난달 17일 오후 3시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인력송출 업체 비나(VINA) JSC에서는 우렁찬 일본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래 고등학교였다는 5층 건물을 개조한 업체 교실에는 한반 당 15명~20명의 교육생이 해외 이주하기 위한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교육생이 먼저 베트남어를 말하면 나머지는 일본어로 복명복창했다. 교실 출입문과 벽면에는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적힌 A4 용지 크기의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있었다. 45도까지 치솟은 체감 기온도 교육생의 학구열을 꺼뜨리진 못했다.

지난 2016년 설립한 이 업체는 2018년부터 일본으로 비숙련 노동자 1000명과 유학생 500여 명을 해외로 보냈다. 기계공학, 제조, 전자 등 기술 분야 전문 인력도 700명 넘게 송출했다. 총 11개 반으로 현재 교육생은 200명이 넘는다. 기숙사도 운영한다. 일본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팜 반 싸우 VINA JSC 사장을 비롯해 11명의 교사가 있다.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인력 송출업체 VINA JSC의 모습. 하노이=이태윤 기자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인력 송출업체 VINA JSC의 모습. 하노이=이태윤 기자

판 반 싸우 VINA JSC 사장은 “베트남에서 해외 진출 관심이 증가해 이젠 일본을 넘어 한국이나 호주, 독일 등 나라로 사업을 확장하려 한다”며 “다만 한국은 정부의 인원 제한이 심하고 비자 받기 어려워 걱정”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예견된 ‘이민시대’를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연재 기획을 보도하고 있다. 이민 유치 경쟁국 일본과 국내 상황을 돌아본데 이어 세 번째로 인력 송출국 베트남에서의 현실과 한국의 위상을 취재했다. 취재진은 지난달 17일~19일 베트남의 인력 송출업체 3곳에 업체 관계자, 이주 준비 교육생 등을 만났다. 그들은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베트남 청년과 인력을 원하는 한국 기업 사이 공급을 막는 ‘벽’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가장 큰 벽은 한국 정부의 ‘공급자 마인드’다. 한국 행을 원하는 베트남 청년이나 인력이 급한 기업 입장이 아닌 정부의 편의가 먼저라는 지적이다. 베트남 청년 사이에서 한국은 ‘나중엔 갈 수 없는 나라’로 통했다. 일본과 대만 등은 고등학교 졸업 후 5~7년 뒤에도 비자를 받을 수 있으나 한국은 유학생 신분으로 갈 경우 졸업 후 2년이 지나면 사실상 유학 비자 합격이 불가능해서다.

베트남 하노이 인력송출업체 비나(VINA) JSC에서 일본 이주를 준비하고 있는 베트남 청년들. 왼쪽부터 호 반 홍(18), 부 티 쑤언 하(19), 응우옌 꽈 중(20). 하노이=이영근 기자

베트남 하노이 인력송출업체 비나(VINA) JSC에서 일본 이주를 준비하고 있는 베트남 청년들. 왼쪽부터 호 반 홍(18), 부 티 쑤언 하(19), 응우옌 꽈 중(20). 하노이=이영근 기자

서석용 한국이민전문가협회 하노이 지부장은 “법적 제한은 없지만 졸업 후 3년차만 돼도 ‘예비 불법 체류자’로 취급해 비자를 안 내주는 게 현실”이라며 “관리가 힘들 것 같은 경우는 애초에 안 받겠다는 건 시장의 수요를 무시한 공급자 논리”라고 지적했다.

현지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규제라는 불만도 이어졌다. 부 티 쑤언 하(19)는 “해외 취업을 원하는 베트남인은 대부분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졸업 후 2~3년간 일하며 이주 준비금을 모아야 한다”며 “이런 경우 한국 행은 애초에 포기한다”고 말했다. 대만 전자기업에 취업할 예정인 담 티 흐엉(32) 역시 “대만의 경우 건축이나 간호 등 분야는 50세가 넘어도 일할 수 있으나 한국은 나이 제한이 엄격하다”며 “한국에서는 30세가 일하기 많은 나이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한국 이민 관련 기관 종사자의 고압적 태도도 문제다. 박미형 UN 국제이주기구 베트남 사무소장은 “이주 문제에 있어 한국은 주도적으로 움직이기보단 베트남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알아서 가져오란 식”이라며 “이민 제도 자체를 시혜적으로 운영하는 경향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베트남에 이주 관련 출장을 오면서 통역 없이 온 경우도 있었다”며 “마침 현장에 있던 UN 직원이 짧은 영어로 통역 무료 봉사를 해야 했다”고 하소연했다.

‘갑질’은 다른 송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핀에 있는 안일호 마닐라 코리아타운협회 부회장은 “한국 공무원이 필리핀 지방자치단체에 계절근로자 관련 공문을 ‘아래아 한글’ 파일로 보내 그 기관에서 나에게 문서를 열어 달라고 한 적도 있다”며 “필리핀에서 한글 프로그램을 쓰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은 채 양식을 마음대로 보내고 ‘급한 쪽’에서 알아서 확인하란 태도”라고 비판했다.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인력 송출업체 VXT에서 베트남 청년들이 용접 등 기술 공부를 하고 있다. 하노이=이태윤 기자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인력 송출업체 VXT에서 베트남 청년들이 용접 등 기술 공부를 하고 있다. 하노이=이태윤 기자

한국의 벽에 막힌 베트남 청년들은 다른 나라로 떠날 준비를 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비자를 따기 쉬운 일본과 대만으로 인력이 몰렸다. 베트남 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베트남의 국가별 송출 인력 규모는 일본 6만7295명, 대만 5만8598명이지만 한국은 9968명에 그쳤다. 일본, 대만 쏠림은 올해에도 이어졌다. 일본과 대만으로 떠난 베트남인은 지난 1분기에만 4만5840명으로 연간 베트남 송출 쿼터(약 15만명)의 3분의 1을 이미 채웠다. 송출업체 트래디멕스코의 팜 티 호아 대표는 “대만의 경우 비자 합격률이 거의 100%”라며 “불합격 리스크(위험)가 적다 보니 임금이 한국의 절반 수준임에도 지원자가 많다”고 말했다.

박창덕 한국이민사회전문가협회 국제교류협력본부장은 “인력을 많이 받으면 어떤 부서는 좋겠으나, 관리하는 부서는 피곤한 일만 생긴다”며 “한국은 이민 관련 업무가 법무부, 고용노동부, 농림축산부, 여성가족부 등 쪼개져 있다 보니 이해관계가 달라 인력 수급 자체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 대만이 베트남에서만 매년 5~7만명을 받는데 한국은 1만 명도 안 받는다는 게 시장 수요에 맞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다른 나라에선 ‘장관’이 직접 이민 시대를 준비하는 ‘영업맨’을 자처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5월 장관 격인 후루카와 요시히사 전 법무상이 베트남 노동보훈사회부를 직접 찾았다. 인력 송출국의 목소리를 듣고 이민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응우옌 짜 리엠 베트남 노동보훈사회부 해외노동국 부국장은 만남을 통해 “일본에서 일하는 베트남인은 ‘기능 실습생’이란 이름으로 묶여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이 부분이 타당한지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일본은 지난 4월 30년 만에 기능실습제 폐지 수순을 밟았다.

요미우리 신문은 지난 4월 11일 2면 톱기사를 통해 30년간 운영해온 기능실습제도 폐지 소식을 전했다. 기사 제목은 ″기능 실습 폐지안...인재 획득 경쟁에 위기감...일하기 쉬운 환경 담보″. 도쿄=이영근 기자

요미우리 신문은 지난 4월 11일 2면 톱기사를 통해 30년간 운영해온 기능실습제도 폐지 소식을 전했다. 기사 제목은 ″기능 실습 폐지안...인재 획득 경쟁에 위기감...일하기 쉬운 환경 담보″. 도쿄=이영근 기자

독일은 지난 2월 아프리카 가나에 장관 2명을 함께 보냈다. 이민 고용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독일은 지난 2017년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이주 상담 센터를 설립하고 꾸준히 인력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독일 언론에 따르면 후베르투스 하일 독일 연방노동부 장관이 가나에서 “자격 갖춘 인력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베냐 슐츠 독일 연방경제협력개발부 장관도 “가나는 청년 실업률이 높고, 독일은 빈 일자리가 많다”며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반면 한국은 지난 3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3개국을 방문해 선진국의 출입국·이민 정책을 살폈으나, 이후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그마저도 인력 송출국은 가지 않았다. 조영태 서울대 인구정책연구센터장은 “선진국에서 타산지석 삼을 부분이 분명 있으나 한쪽만 보면 반쪽 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시시각각 변하는 송출국의 노동 시장, 배출 압력 등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현재 인기에 취해 있다가 금세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고 우려도 나온다. 조영태 센터장은 “국제 이주시장에서 한국은 메이저리그가 아니라 ‘싱글 A’ 수준”이라며 “앉아서 문만 연다고 이민자가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한다”며 “서울대도 유학생을 유치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루옹 쾅 당 보건부 인구가족계획국 인사조직과장이 지난달 16일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하노이=이영근 기자

루옹 쾅 당 보건부 인구가족계획국 인사조직과장이 지난달 16일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하노이=이영근 기자

윤도연 UN 국제이주기구 책임은 “한국은 송출국에서 미국, 유럽으로 가기 전 돈을 모으기 위해 3~5년 일하는 ‘징검다리’ 위치”라며 “아직은 한국에 가려는 수요가 많아 갑의 위치에 있을 수 있으나 독일, 호주 등에서 나서면 상황은 급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루옹 쾅 당 베트남 보건부 인구가족계획국 과장도 “일본이나 대만은 물론 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도 인력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며 “앞으로 인력 유입국 간 경쟁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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