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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15년 일한 요리사 "4년제 대학 나와야 영주권 준대요" [이제는 이민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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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에서 15년 요리사 생활했는데, 인제 와서 대학 졸업장을 따오라니….”

지난 7일 서울 공덕동의 한 튀르키예 음식점에서 만난 세르달 아카다(34)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는 “세금 한 번 밀린 적 없고, 성실히 일했는데 영주권을 따려면 대학 학벌이 필요하다고 한다”며 “요리사가 꼭 대학을 나와야 하나?”라고 되물었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유창했다. 지갑을 찾으러 온 손님에게 “좋은 밤 되세요”라고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그가 요리사로 일하는 식당은 오후 10시가 넘어서도 손님으로 붐볐다. 대부분 한국인 손님이었으나 고객 응대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튀르키예 국적의 세르달 아카다(34)는 15년차 베테랑 요리사다. 이영근 기자

튀르키예 국적의 세르달 아카다(34)는 15년차 베테랑 요리사다. 이영근 기자

그도 그럴 것이 세르달은 15년 차 베테랑이다. 지난 2009년 성인이 되자마자 홀로 한국 땅을 밟은 후 쭉 요리사 경력을 쌓았다. 이젠 ‘튀르키예로 갈 때보다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한 수준’이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올해 초 영주권을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체류 기간에 제한이 없는 준전문인력(E-7-2) 비자를 이미 보유하고 있지만, 갱신을 위해 출입국외국인사무소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생활에 질렸다.

최근 튀르키예에서 발생한 지진도 그의 결심에 영향을 줬다. 지난 2월 튀르키예를 덮친 강도 7.8의 대지진으로 그가 살던 카흐라만마라슈의 집이 완전히 무너졌다. 세르달은 “지진으로 돌아갈 튀르키예의 집도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원래 내 세상은 한국에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실제로 친구도, 일자리도 모두 한국에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을 꺾은 건 주변 한국인의 차별도, 직장의 텃세도 아니었다. ‘학벌’과 ‘연봉’이 문제였다. 영주권을 안내하는 행정사는 그에게 “일반영주권(F-5-1)을 빠르게 따려면 4년제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했다. 대학을 갈까 고민도 했으나 영주권 문턱에는 난관이 하나 더 있었다. ‘돈’이었다. 일반영주권(F-5-1)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연 소득)의 2배 이상을 요구한다. 2022년 GNI는 4220만 원. 세르달의 연봉이 8440만 원을 넘겨야 한단 의미다. 세르달은 “한국인 중에서도 34세에 8500만원 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세르달 아카다(34)는 "5년 뒤면 한국과 튀르키예에서 보낸 세월이 같다"고 했다. 이영근 기자

세르달 아카다(34)는 "5년 뒤면 한국과 튀르키예에서 보낸 세월이 같다"고 했다. 이영근 기자

저출산·고령화의 급속한 진행은 한국에 노동력 부족 문제를 가져왔다. 지방과 도시, 1차·2차·3차 산업을 가리지 않고 인력이 모자라다. 이민 시대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를 위해서는 적재적소에 외국인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들어온 외국인의 적응을 돕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외국인은 법의 사각지대로 빠져 사회적 비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세르달 같은 인력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이미 적응을 잘 마친 ‘검증된’ 외국인을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하면 불필요한 갈등을 피할 수 있어서다.

문제는 한국의 이민 정책이 ‘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정부 부처 중 이민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곳이 법무부라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유연한 이민 정책이 필요한 시점에 되려 규제와 단속만 강해질 수 있단 지적이 나온다.

김도균 전 제주출입국·외국인청장은 “이민 정책은 미래를 설계하는 일인데 규제 DNA를 가진 법무부와는 결이 안 맞는 측면이 있다”며 “법무부가 사령탑을 맡겠다면 경직된 이민 정책을 넘어 실현 가능한 ‘정주 사다리’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청장은 법무부에서 이민정보과장, 출입국심사과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잘 아는 ‘친정’에 쓴소리를 한 셈이다.

법무부의 ‘규제 DNA’는 체류 자격을 정하는 비자 업무를 보면 알 수 있다. 현행 비자 체계에서 외국인이 정주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나 다름없다. 규정은 빈번히 바뀌고 조건도 까다롭다. 대분류로 37개(A~H), 소분류로는 250여개에 달하는 복잡한 체계를 외국인이 정확히 파악해 스스로 필요한 기준을 준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무수히 많은 세르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비자 업무에 잔뼈가 굵은 장만익 행정사는 “한국에 10년, 20년 넘게 산 숙련 인력이 높은 비자 문턱에 좌절한 사례는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 결과 한국의 영주자 비율은 ‘쇄국’을 지향한 일본보다도 낮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총 체류 외국인은 224만5912명, 그중 영주권자는 17만6107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체류 외국인의 7.8%에 불과하다. 게다가 전체 영주권자 중 가족·동포가 아닌 경제이민 경로(50만 달러 이상 투자·국내 박사 학위 등)를 통한 영주권자의 비중은 2011년 이후 2~3% 수준을 맴돌고 있다.

반면 일본 출입국재류관리청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총 체류 외국인 307만5213명 중 영주 자격을 가진 외국인은 86만3936명이다. 체류 외국인 4명 중 1명꼴로 영주자격을 가진 셈이다. 비율이 한국보다 3배나 높다.

일본의 경우 일반 영주 기준 소득 요건을 구체적으로 정해 놓지 않았다. 거주 기간만 10년 이상이면 된다. 연 소득은 300만엔(약 3000만원) 이상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한일 이민 정책을 두루 연구한 선원석 오사카대 경제법과대 연구원은 “전통적으로 일본은 장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며 “소득과 학력보다는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을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규제 DNA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법무부가 지난 2017년 도입한 ‘외국인 숙련기능인력 점수제 비자’ 제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제도는 비숙련 취업이민제도(E-9·E-10·H-2)를 통해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가 소득, 자격증, 학력, 한국어 능력 등에서 일정 점수를 확보하면 준숙련기능(E-7) 비자로 전환을 해주기 위해 도입했다. E-7 비자는 체류 기간의 제한이 없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하지만 이 제도를 통해 체류 자격을 바꿀 수 있는 인원은 전체의 0.51%(2022년 기준)에 불과하다. 이 제도가 사실상 E-9에서 E-7 비자로 전환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99%를 거르기 위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전환 비율을 인구 대비 이주민 비율인 5% 수준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문해왔다. 하지만 점수제 비자 쿼터는 지난해 2000명에서 올해 5000명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점수 확보 자체가 힘든 산업도 있다. 어업이 그렇다. 외국인 어선원은 대졸 미만이 대부분이라 학력 항목에서 득점이 어렵고, 한국어 활용도가 낮은 어업의 특성상 한국어 능력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일괄적 규제 정책이 아닌 현장별 제도 유연화가 필요한 이유다. 중국에서 온 4년 차 선원 리지빙(43)도 곧 한국을 떠나야 한다. 체류 기간이 다해서다. 여수에서 조기를 주로 어획하는 34t급 유자망 어선을 운영하면서 리지빙과 함께 일해왔던 선주 김석두(62)씨는 아쉽기만 하다. 김씨는 “리지빙은 중국에서 뱃일을 하다 들어와서 처음부터 일을 잘했다”며 “불법체류가 난무하는 어촌에서 쭉 같이 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존재”라고 했다.

지난 3일 여수에서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선주 김석두(62·좌)씨와 중국 국적의 어선원 리지빙(43·우). 이영근 기자

지난 3일 여수에서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선주 김석두(62·좌)씨와 중국 국적의 어선원 리지빙(43·우). 이영근 기자

최서리 이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좋은 취지를 갖고 시작한 제도라고 하나 결과적으로 숙련 어선원은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게 현실”이라며 “인력 순환만으로는 국내 어업이 사실상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숙련인력이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직된 이민 정책이 오히려 불법체류자를 양산한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불법체류자 수는 2017년 25만1041명에서 올해 3월 41만4045명으로 꾸준히 증가해왔다. 김도균 전 제주출입국외국인청장은 “불법체류자 수는 이민 정책의 종합적인 성적표”라며“규제만 강화했다가 시장 관리에 실패한 성적표를 받아든 것”이라고 평가했다.

법무부도 변화를 꾀하고 있기는 하다. 지난해부터 ‘지역특화형 비자 사업’을 시범사업으로 실시했다. 인구감소지역에 취업하는 외국인 유학생과 동포를 대상으로 거주(F-2)와 동포(F-4) 비자를 선발급 해주고, 해당 지역에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거주하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 내에서는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이주민의 반응도 뜨겁다. ‘지역특화형 비자’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그룹 가입자는 1만 명을 넘어섰다. 이곳에서 이주민들은 도움을 요청하거나 비자 발급을 자랑하는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달 25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김도균 전 제주출입국·외국인청장은 "정주 사다리가 튼튼해야 불법체류자 수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지난달 25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김도균 전 제주출입국·외국인청장은 "정주 사다리가 튼튼해야 불법체류자 수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물론 비자 규제를 완화할 경우 외국인이 몰려들어 내국인이 일자리를 빼앗기거나 이민자 집단 거주지의 슬럼화, 범죄 발생 등 부작용이 발생할 우려도 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전 한국이민학회장)는 “지나치게 많은 이민자가 정착하면 그에 따른 복지 비용, 사회적 갈등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며 “준숙련 이상의 인력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유연하되 선별적인 이민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정확한 통계에 기반해 예상 가능한 부작용에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민자 유입이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이종관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민자 유입으로 건설 분야 저숙련 일자리가 줄어든 사실은 확인됐지만, 제조업 등 다른 분야에는 영향이 미미했다”며 “오히려 내국인 일자리 보호를 위해 사업장 변경을 제한하는 고용허가제의 비정주형 이민자가 재외동포 등 정주형 이민자보다 내국인 일자리를 더 많이 감소시킨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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