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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차 작업반장' 베트남인 람…기껏 만든 기술자 돌아갈 판 [이제는 이민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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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 3월 3000평 넓이의 광주광역시 금형업체 ‘피스템코’ 공장에 들어선 작업반장이 한글 전문용어가 빼곡한 도면과 부자재 리스트를 눈으로 훑어내렸다. 이어 금형 프레임 앞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다른 노동자 2명에게 작업 지시를 내렸다. 이 작업반장과 노동자들은 모두 베트남인이었다.

작업반장 웬 반 람(27)은 6년차 숙련공이다. 원인 분석, 분해, 조립에 이르는 전 공정을 혼자서 수행할 수 있다. 삼성전자에 부품을 납품하는 이 업체 장인성 사장은 “금형은 1000분의 1mm만 어긋나도 불랑 판정이 나기 때문에 반장을 맡기까지 보통 10년은 걸린다”며 “람은 기술뿐 아니라 한국어, 리더십 능력이 탁월해 지난해 금형 조립파트의 조장으로 정식 임명됐다”고 말했다.

광주 소재 금형업체 피스템코에서 최초로 외국인 조장에 임명된 웬 반 람(27·가운데)이 지난 3월 분해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광주 소재 금형업체 피스템코에서 최초로 외국인 조장에 임명된 웬 반 람(27·가운데)이 지난 3월 분해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한국의 취업이민제도는 저숙련 인력을 고용 후 되돌려보내는 ‘단기순환 원칙’을 기조로 운영돼왔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는 “일이 손에 익으려면 최소 3년은 필요한데 그 때가 되면 곧 내보내야 한다”는 불만이 많다. 고용노동부조차 지난해 12월 주력 취업이민정책인 고용허가제(E-9) 개편 발표를 하면서 “20년 전 제도 설계 당시의 기본 틀을 큰 변화 없이 유지하다 보니 제도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효과성은 떨어질까 봐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밝혔을 정도다. 그래서 전문가 사이에서는 “외국인력의 ‘유치→양성→취업→정주’를 매끄럽게 잇는 ‘육성형 이민정책’ 기조를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사실 람은 준비된 인재였다. 정부가 2014년부터 육성형 이민정책의 하나로 운영해온 ‘뿌리산업 외국인 기술인력 양성대학’ 제도의 수혜자다. 뿌리산업 양성대학은 용접·금형 등 제조업 근간을 이루는 뿌리기업의 만성적 인력난을 완화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정부가 선정한 대학이 뿌리기업에 취업할 유학생을 모집한 뒤 2년간 한국어, 전공 기술을 가르치고 현장 실습도 병행해 맞춤형 인력으로 키워낸다.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가 검증하는 최종 평가를 통과하면 유학 비자 (D-2)에서 숙련기능인력(E-7-4) 비자로 체류 자격이 전환된다. E-7-4 비자는 체류 기간의 제한이 없고 가족 초청이 가능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선망하는 체류 자격이다.

뿌리산업 양성대학 출신 응우옌 녹뚜안안(26)이 지난 3월 광주광역시 금형업체 피스템코 공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뿌리산업 양성대학 출신 응우옌 녹뚜안안(26)이 지난 3월 광주광역시 금형업체 피스템코 공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고용허가제(E-9) 외국인 노동자에 비해 한국어와 기술 수준이 높다보니 기업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안정된 체류자격을 갖고 있어 불법체류율도 적다. 고질적 재정난에 시달리는 대학도 유학생 모집을 통해 숨통이 트인다. 최석열 피스템코 인사팀 차장은 “기존 E-9 근로자와 비교하면 현격한 기량 차이를 확인했기 때문에 뿌리 산업 양성대학 제도를 통해 추가로 6명을 채용했다”며 “지금까지 퇴사자는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검증된 제도지만 정부 예산 지원은 0원이다. 이 때문에 시행된 지 8년이 지났지만 누적 졸업생은 지난해 12월 기준 664명에 불과하다.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 관계자는 “예산 편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계속 무산됐다”며 “교육부 유학생 예산과 중복된다는 등의 이유로 기획재정부가 계속 반려했다”고 말했다.

비자 발급도 난관이다. 백일현 전주비전대 자동차과 교수는 “대학이 현지 면접 등을 통해 옥석을 가려내도 현지 대사관이나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사무소에서 유학생 비자를 잘 발급해주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비자 불허 이유조차 공개되지 않아 대학이나 외국인들의 답답합은 배가된다. 실제 비자 발급이 거절된 지원자의 탈락 사유를 확인해보니 ‘11. 기타’라는 단어 외에는 어떤 것도 기재돼 있지 않았다.

뿌리산업 양성대학 지원자의 비자 신청 결과. 발급이 거절됐지만 사유를 확인할 수 없다. 독자 제공

뿌리산업 양성대학 지원자의 비자 신청 결과. 발급이 거절됐지만 사유를 확인할 수 없다. 독자 제공

백 교수는 “50명을 모집하려 했는데 25명만 입학한 적도 있다"며 "인구 소멸 지역을 활성화할 인력을 데리고 오는 것인 만큼 비자 요건을 완화하거나 비자 탈락 시 명확한 사유를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돌봄노동 분야에도 육성형 이민정책을 적용해 초고령화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특히 간병 분야는 의사소통 능력이 중요하고 전문성이 요구돼 정부는 개방에 신중을 기해왔다. 현재 문화와 언어의 이질성이 비교적 적은 재외동포에게만 돌봄 서비스 분야가 열려있다. 김유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돌봄서비스의 외국인 종사자에 관한 기초연구’(2021)에서 “돌봄과 체류자격을 연계하는 비자 경로를 설계하거나, 유학생 등 자격과 기술을 갖춘 국내 외국인력을 돌봄 영역으로 유인하는 등의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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