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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수신료 분리가 주권 찾기라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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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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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료 분리 고지로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지난 4월 13일 국회에서 ‘언론소비자주권행동’이 회견을 열어 정부의 KBS 수신료 분리징수 움직임을 성토했다. 그런데 이 단체는 홈페이지에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시청자 주권을 되찾기 위해 수신료 분리 고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1700여 시청자와 함께 KBS와 한국전력에 분리 고지를 신청하고, ‘분리 고지 거부 취소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실제로 이 단체는 2015년에 소송을 냈고, 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항소와 상고를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염원하던 수신료 분리 고지를 윤석열 정부가 하겠다는데, 드디어 시청자 주권을 찾게 됐는데, “당장 중단”을 외친다.

분리 주장한 단체가 윤 정부 성토
통합 폐지 주장하던 민주당 돌변
비합리 제도 고치는 게 왜 문제?

“KBS가 TV 수신료를 징수할 때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공사가 송출하는 방송을 시청하지 않는 시청자에게 강제 납부하게 하는 불합리한 점이 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수신료 분리 징수를 위한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앞서 2014년에도 같은 당의 노웅래 의원이 같은 취지의 법안을 내며 비슷한 주장을 했다. 이토록 야당 의원들이 원했던 수신료 분리 징수를 정부가 하겠다는데, 민주당 의원들이 대통령실에 항의서를 보내며 “추진 중단”을 촉구한다. 같은 일인데 내가 하면 정의, 남이 하면 불의가 되나.

20여 년간 반복된 패턴이 있다.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 코드에 맞는 사람이 KBS 사장에 임명된다(신문사 출신이 느닷없이 사장이 된 적도 있다). 보도·교양·예능을 망라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야당은 어용 방송이라고 비난한다. KBS 사장은 ‘수신료 현실화’(인상을 KBS는 이렇게 말해 왔다)를 정권에 요청한다. 정권도 호응한다. 야당은 극력 반발한다. 국민도 화를 낸다. 수신료 분리 고지 요구와 납부 거부 운동이 번진다. 정치적 부담을 안은 정권이 슬며시 발을 뺀다. KBS 경영진은 최선을 다했다고 구성원들에게 말한다. 노무현·문재인 대통령 시절에는 지금의 여당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는 지금의 야당이 분리 징수가 옳다고 했다. 전기요금 고지서에 수신료를 넣어 함께 내도록 하는 게 부당하다고 시차를 두고 여야 모두 주장했다. 등장인물만 바뀌는 식상한 리메이크 드라마를 윤석열 정부는 계승하지 않겠다고 한다.

정권에는 KBS를 자기편으로 묶어 두는 카드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수신료 인상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 징수 폐지다. KBS에 좋은 것, 나쁜 것 한 개씩이다. 수신료 인상은 두어 번 실현 직전까지 갔다. 통합 징수 폐지는 시도한 적이 없다. KBS 구성원들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그것을 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처럼 전 정권이 임명한 방송통신위원장이 버텨도 결국 물러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KBS 사장을 정권이 임명할 수 있는데 최대 방송사와 척을 질 이유가 없다는 게 믿음의 근거였다. 그런데 정부가 그 카드를 주머니에서 꺼낸다. ‘좋은 게 좋은 것’과의 결별이다.

KBS 수신료 분리징수를 한국 언론사들이 바라지 않았다. 수신료 징수로 KBS로 가는 돈이 약 6200억원이다. 전기요금에서 떼어내 따로 고지서를 발송하면 그 수입이 1700억원 정도로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KBS 내부 분석이다. 그렇게 되면 KBS가 광고 수입 확대를 꾀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로 다른 방송사를 포함한 언론사들 몫의 파이가 줄 수 있다. 분리징수 요구가 계절풍에 그쳤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미디어 시장 현실이다.

KBS 안 보는 사람이 점점 는다. 맘에 안 들어서, 볼 게 없어서, 다른 데 볼 게 많아서,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운 공영방송이 아니라서. 이유가 많다. 이런데도 전기요금에 묶어 강제로 내도록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지금의 야권도 과거에 그렇다고 했다. 이것을 윤석열 정부가 고치려고 한다. 대관절 왜 안 된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