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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렬의 시시각각

‘피크 코리아(Peak Korea)’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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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피크 재팬(Peak Japan)’. 일본이 정점을 찍었다는 의미다. 김종인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비상대책위원장이 2020년 여름 일본을 반면교사 삼자며 이 제목의 책을 당 의원들에게 나눠줘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그러나 요즘 일본은 ‘피크 재팬’과 거리가 멀다. 일본 경제는 지난 1분기(1~3월) 0.7% 성장했다. 이 성장세가 이어진다고 가정한 연간 성장률은 2.7%다. 반면에 한국은 1분기에 0.3% 성장했다. 한국은행의 올해 성장 전망치는 1.4%. 한국은 거북이걸음인데 일본은 뛰고 있는 양상이다.

일본, 주가 뛰고 디플레 탈출 조짐
미국 붙잡고 반도체 부활에 시동
한국, 개혁 못 하면 저성장 늪으로

주가는 연일 30여 년 만의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대표지수인 닛케이 평균주가는 올해 들어 약 30%나 올랐다. 넘쳐나는 외국인 관광객은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4월에만 약 200만 명의 외국인이 일본을 찾았고, 월간 여행수지 흑자가 2941억 엔(약 2조7000억원)에 달했다. 같은 달 한국 여행수지는 5억 달러(약 6000억원) 적자를 냈다.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았던 물가도 뛰고 있다. 소비자물가지수는 20개월 연속 상승 중인데, 4월엔 3.4% 올랐다. 무제한 통화 발행의 아베노믹스를 펼쳤던 아베 전 총리(2022년 7월 사망)도 못했던 디플레이션 탈출을 기시다 총리가 가시화하고 있는 형국이다.

하이라이트는 미·일 경제협력의 획기적 강화다. 지난달 말 미국 상무장관과 일본 경제산업상이 회담 뒤 내놓은 ‘미·일 상무·산업 파트너십(JUCIP)’ 공동성명이 단적인 예다. 성명엔 “반도체 공급망의 회복 탄력성을 해치는 생산의 지리적 집중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메모리)과 대만(파운드리)이 맡아온 반도체 생산을 미국과 일본도 직접 하기로 양국이 의기투합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국엔 악재고, 일본엔 호재다. 실제로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이 일본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고, IBM은 일본 기업과 첨단반도체를 공동 개발 중이다. 1980년대 후반 미·일 반도체 협정과 플라자 합의로 일본 반도체 산업을 저격했던 미국이 이젠 첨단기술까지 지원하며 일본 반도체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인구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지난해 일본 합계 출산율은 1.26명. 역대 최저다. 이런 일본을 두고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작년에 “출산율이 사망률을 넘는 변화가 없다면 일본은 결국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저출산·고령화라면 일본은 한국보다 사정이 훨씬 낫다. 한국의 지난해 합계 출산율은 0.78명, 세계 꼴찌다.

『피크 재팬』(브래드 글로서먼)은 위기를 맞아도 문제를 고치지 않는 ‘변화의 지체’ ‘개혁의 부재’가 일본의 쇠퇴를 부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고 개혁 거부하기로 치자면 한국이 일본보다 몇수 위 아닐까. 한국엔 19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국가적 차원의 개혁이 없었다. 노동개혁도, 연금개혁도, 공공부문 개혁도 해내지 못했다. 규제·차별·기득권 장벽이 도처에 있다. 양질의 일자리는 한정돼 있고, 부동산·교육비 등의 고비용 구조는 견고하기만 하다. 그래서 청년층은 아예 결혼을 꺼리고, 출산을 기피한다. 정치권의 갈등 해결 역량은 바닥이다. 이번엔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를 놓고 2008년 광우병 사태 때처럼 볼썽사납게 대립하고 있다.

일본이 역대 최저 출산율을 기록했다는 중앙일보 기사엔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그래도 우리보단 낫네요. 저도 결혼할 생각 없어요. 주변 애들도 거의 다 비혼주의고 사회가 이런데 낳고 싶을까요. 뭘 하든 어차피 학력이나 재력으로 패대기쳐지니 나 혼자 먹고살기도 바쁘고...(후략).”
반박하기 어려운 얘기다. 청년이 좌절하면 사회는 저활력ㆍ저성장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일본은 피크를 뚫고 나아가는데, 한국은 ‘피크 코리아’가 성큼 다가오는 것 같다. 이것이 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