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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 25% 「떡고물」 챙긴 이후락(청와대비서실: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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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군납·외자도입때마다 거액 커미션/72년 중정부장때 재산 2백억 넘어/이후락 실장/“여비서 구속했다” 김형욱에 총 겨눠/경남대와 마산MBC 헐값 매입도/박종규 실장
박정희 정권의 울타리 속에서 청와대비서실장·경호실장·정보부장 3자의 권력관계는 크게 두 가지 양태를 보였다.
이들 3자의 역학관계는 국내정세의 파고에 따라 때론 격렬한 갈등을 빚었으며 때론 잡음없는 공존을 이루었다.
5·16으로 태동한 박 정권이 장기집권의 레일을 깐 69년 3선 개헌 때까지 이후락 비서실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은 끊임없이 어깨를 부딪쳤으며 정권이 벼랑 끝으로 치닫던 78년부터 79년 10·26까지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정보부장간에 줄기찬 마찰음을 내다가 마침내 정권과 생사를 건 일전을 벌이고 말았다.
60년대 청와대를 둘러싼 권력암투는 이후락·박종규간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경쟁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두 사람간의 기질차이가 이를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됐다.
제갈조조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이는 치밀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모사인 데 반해 박은 선이 굵고 단순한 행동파여서 둘 사이에는 주파수가 맞지 않아 생긴 갈등과 에피소드가 많았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밑에서 차장보를 지냈고 후일 보안사령관으로서 권력의 핵심에서 박종규와 잦은 교유를 했던 강창성씨(육사 8기)는 두 사람의 관계와 성격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이 실장은 52년 미 병참학교 고등군사반 시절부터 치밀한 두뇌로 미군장교들의 주목을 받았지요. 그는 61년 장면 내각에서 중앙정보위원회라는 최초의 정보기관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5·16 후 반혁명세력으로 투옥되기도 했지만 그 지모로 후에 권력을 요리했고 권력을 다루는 기술로만 치면 지금의 3김씨보다 뛰어납니다. 화통하고 성격이 급한 박 실장이 수없이 덤벼들었지만 번번이 판정패였어요.』
강씨는 두 사람의 성격을 비교할 수 있는 일화 두 가지를 소개했다.
『72년 10월유신을 발표하기 일주일 전께 박 대통령은 자신의 방일문제를 협의하라며 박 실장을 일본에 보냈지요. 그때 이 실장은 유신선포작업을 총지휘하고 있었는데 박 대통령의 방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 박종규에게 방일준비를 시키자고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죠. 박 실장은 당시 보안사령관·수경사령관을 비롯한 군의 핵심인사들에겐 유신선포 20일 전께 계획을 은밀히 통보하고 역할분담을 시킨 뒤 10일 전까지 준비상황을 보고하도록 했어요.
그러면서도 박종규 경호실장에겐 귀띔은커녕 속여 일본에 보내버렸지요. 아무것도 모르던 박 실장은 일본 정계지도자들에게 열심히 국내정세를 설명하고 돌아왔는데 바로 다음날 유신이 선포되고 그는 핫바지저고리가 되고 말았어요. 분기 탱천한 박 실장은 나를 비롯한 요직자들에게 유신계획을 언제 알았느냐고 묻고 다녔지요. 자기만 빼놓았다는 것을 안 그는 이후락을 죽여버리겠다고 흥분했지만 HR가 측근에게 털어놓은 대답은 간단했어요. 「박은 입이 싸 보안유지가 안 된다」는 거였죠. 이 실장은 박 실장이 술만 한 잔 들어가면 다 털어놓는다고 의심했거든요.』
강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어느 토요일 오후 HR가 골프를 치러가자고 전화를 걸어왔어요.
관악컨트리 신코스에서 박종규 실장·서정귀씨와 크게 내기골프를 치는데 와서 심판을 봐달라는 거예요. 당시 이 실장은 핸디가 25,박 실장은 12였는데 박 실장이 스크래치를 하자는 거예요. 바둑으로 치면 1급과 8급이 맞두자는 것과 같지요. HR(이 실장)가 무슨 소리냐고 화를 벌컥 내더군요. 그런데도 박 실장은 막무가내였어요. 얼마짜리 내기인지는 몰랐는데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된다,안 된다고 다투는 것으로 봐 큰 판이란 느낌은 왔어요. 결국 HR가 양보하더군요. 불공정 게임이 시작된 거죠. 정상적으로 치면 박이 돈을 따는 것은 물으나마나였죠.
그런데 여기서부터 HR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거예요. HR는 번번이 반칙을 하다 공이 벙커(모래)에 빠졌어요. 날보고 멋진 벙커 플레이를 구경하라면서 공을 집어들어 티를 꽂고 올려놓더군요. 이 모두가 반칙이거든요. 이 장면을 박이 목격하게 유도하는 겁니다.
박 실장이 이에 분노하자 이 실장은 자기는 룰이 그런 줄 알았다고 능청을 떠는 거예요. 이때부터 박 실장은 자기 치는 것보다 이 실장의 반칙 감시에 더 신경을 썼지요. 골프를 해보면 알지만 이런 심리상태로는 자신이 잘 쳐서 상대를 이기기 어렵습니다. 결과는 박이 이에게 졌지요. 바둑 8급이 맞둬서 1급을 이긴 겁니다. 박의 기질이 이에게 진 것이죠.
이후락은 이처럼 박종규를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박종규는 매번 지면서 덕보다는 꾀로 자기를 이기는 이후락이 미웠던 겁니다. 이날도 상당히 큰 돈을 잃었습니다.』
화가 나면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고 성질이 급한 박종규의 성격에 관한 그의 측근 S씨의 증언.
『동백림사건이 시끄러울 때 당시 김형욱 정보부장은 박 실장의 여비서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혐의가 있다며 구속한 적이 있었죠.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박 실장은 김 부장을 남산사무실로 찾아가 「네가 뭔데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내 여비서를 잡아넣느냐. 당장 풀어라」고 호통을 쳤죠. 김 부장이 못 하겠다고 버티자 박 실장은 네 배때기엔 철판을 깔았느냐며 권총을 꺼내 철커덕 실탄을 장전한 후 겨누었어요. 김 부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며 「풀어주겠다. 하지만 나의 부하들 눈도 있고 하니 이틀만 기다려달라」고 사정하더군요. 박 실장이 권총을 거두는데 실탄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떡고물 챙기기」에서도 HR는 두서너 발짝 앞서 갔다. HR는 무한욕심으로 재산을 긁어모아 당대에 거부가 되었지만 박 실장은 그런 면에선 추진력이 다소 뒤졌다.
당시 비서실 사정을 잘 아는 예비역 장성 L씨의 증언.
『71년 4월 7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군수사책임자를 불러 정치자금기부자 리스트 5장을 주었습니다. 리스트에는 HR를 통해 자금을 내놓은 기업인 2백80여 명의 이름과 헌금액이 적혀 있었지요. 액수는 총 2백30여 억 원이었는데 그 액수가 맞나 확인해보라는 거였죠. 박 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크로스체크를 시켰습니다. 특명을 받은 수사책임자는 2백80명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어 대·중·소 규모별로 3인을 골라 은밀히 조사했어요.
놀랍게도 7억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던 대의 모 재벌은 10억원을 냈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고 중·소는 리스트에 적혀 있던 2억원·7천만원과 달리 각각 3억원,1억원을 냈더군요. 조사결과 정치자금의 평균 25%를 HR가 중간에서 가로챈 것으로 드러났어요. 박 대통령은 이 보고를 받자 분노에 손을 떨었고 이후 「직접관리체제」에 들어갔어요. HR는 이밖에도 미8군 군납·재일교포 재산반입·외자도입의 커미션을 거액으로 챙겼고 심지어 주택은행 간부에게 평당 1천원짜리 자기 땅을 은행이 5천원씩에 사도록 강요해 거금을 벌었어요.』
또다른 군수사관계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HR가 정보부장이었던 72년 박 대통령은 「HR가 돈을 너무 챙긴다」는 소문이 들리자 군수사기관을 시켜 재산을 조사토록 했습니다. 그때 재산이 벌써 2백억원이 훨씬 넘는 것으로 나타났지요. 그가 당시 거물급 경제관료 C씨와 함께 사들였다는 팔당댐 주변 땅은 어찌나 넓었던지 헬리콥터를 타고 사진을 찍어 증거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이후락은 정권유지비의 염출과 관리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검은 돈을 만진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정권안정,그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을 앞세워 개인적으로는 범죄에 가까운 치부를 했고 이 땅에 유례없는 부패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외국의 메이저와 국내의 정유업자 사이에 거액의 커미션을 받고 기름값을 높게 책정,우리 국민에게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고 몇몇 재벌을 탄생시키고 그들과 혼맥을 맺어 차후를 대비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또 정실인사의 새로운 패턴을 형성,정계·재계를 연결해 부패의 구조악을 만들었다. 이 점에 대해선 78년 미 의회의 「한미 관계 보고서」(프레이즈보고서)가 구체적으로 뒷받침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김형욱이 미국으로 빼돌린 돈이 1천5백만∼2천만달러이며 이후락도 비슷한 정치자금을 해외에 빼돌렸다는 시사를 준 바 있으며 그가 스위스은행에 비밀구좌를 개설한 증거까지 제시한 바 있었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80년 봄 HR는 김종필·박종규씨와 함께 대표적인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혀 재산몰수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박종규 실장 역시 적지 않은 치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내용이 알려지지는 않고 있으나 HR의 재산을 조사했던 수사관계자들은 『2인자 자리를 놓고 쌍벽을 이루었던 박 실장도 만만치 않은 치부를 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는 마산MBC와 경남대를 권세를 업고 헐값에 사들이기도 했었다. 그와 가까웠던 청와대비서관 출신 S씨는 그러나 이렇게 변호했다.
『박 실장은 HR에 비하면 물욕이 적었지요. 80년 봄 HR와 함께 부정축재자로 몰리자 그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억울하니 모든 걸 파헤쳐 달라」는 탄원서를 내기까지 했지요. 경남대 등을 싸게 사들인 건 사실이지만 재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개인재산이 안 됐고,85년 그가 암으로 죽은 후 유산은 고향 창원집과 야산,그리고 대지 1백20평짜리 한남동집 등 20여 억 원이 전부였어요.』 그러나 이 말을 믿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HR나 박 실장이나 권력을 등에 업고 큼지막한 「눈먼 돈」을 챙겼으므로 씀씀이도 컸다. 측근들은 이를 가리켜 「보스기질」 「큰 그릇」 운운했지만 기본적으로 눈멀어 들어온 돈이 눈멀어 나간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돈의 액수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며 돈을 긁어모으는 데 법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HR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A씨의 회고.
『정보부장시절 하루는 HR가 박 대통령을 만나 거액의 하사금을 받아 부하직원에게 야식비로 나누어준 적이 있었지요. 대표로 간부에게 돈을 집어주었는데 양복 왼쪽 안주머니에서 10만원권 수표다발인 줄 알고 꺼낸다는 것이 실수로 자기몫의 1백만원권 다발을 주었지요. 간부가 뒤늦게 액수를 확인하고 놀라 잘못 주신 것 같다고 자진신고했더니 HR는 「그냥 가져가 풀어」라고 말더군요.』
HR는 남에게 촌지를 줄 때 돈이나 수표를 세어 주는 법이 없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주었고 그 액수는 항상 상대를 놀라게 하거나 감격케 했다.
보스기질이 강했던 박 실장도 이 점에는 못지않았다. 청와대비서관이었던 N씨의 목격담.
『71년 5월 8대 국회의원선거 때 김정렴 비서실장과 함께 청와대 상황실에서 개표를 지켜보다가 자신의 고향인 마산에서 여당 후보가 고전하자 미안한지 슬그머니 경호실장 방으로 가더군요. 방에는 누가 갖다놓았는지 1만원권 뭉치가 있었어요.
박 실장은 즉시 행정처장을 불러 「오늘밤 수고를 하는데 차장부터 청소부까지 똑같이 나눠줘」라고 했어요. 1인당 10만원씩 돌아갔지요.』
그때 10만원이면 서민들에게는 꿈만 같은 액수였다. 이처럼 권력주변에서 돈의 단위에 개념이 없을 정도로 검은 돈,눈먼 돈이 횡행했던 것은 박 정권 권부의 독점적 권력 못지않게 부패가 극심했던 탓이 컸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를 동반한다는 말을 실증할 만한 일들이 무수히 벌어졌던 것이다.
이후락과 박종규의 무한권력과 부패는 10·26과 그 이후 등장한 5공에 의해 시련에 부닥쳤다. 두 사람 모두 국민의 원성의 대상이었고 정권획득과 민심쇄신에 급했던 신군부는 이를 이용했다.
두 사람은 모두 부정부패자로 군수사기관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고 재산 중 일부를 강제헌납당했다.
그러나 이후락은 그 이후 박종규와는 달리 권력을 휘두를 때 빚은 부작용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재기한 김대중과 김종필로부터 죄어오는 새로운 공세를 피해야 하는 2중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두 김씨로부터 「보복」당할 것으로 보였던 그는 용케 과녁을 피해 은둔하고 있다.
HR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재산과 부패의 수완이 바로 그를 현재까지 보복으로부터 비켜 안존하게 하고 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HR와 JP,김대중납치사건과 이후락의 역할은 차후 자세히 다룰 것이다).
「제갈조조」와 「피스톨 박」이 끌고왔던 청와대비서실장 대 경호실장의 갈등시대는 69년 10월 3선개헌의 여파로 HR가 물러나고 김정렴 비서실장이 들어서면서 「공존」의 시대로 접어든다.
한은 출신의 경제관료였던 김 실장은 숫자처럼 정확한 처신과 특유의 비전투적 성격으로 사나운 경호실장들에게 잘 대처해나갔다. 「오도꼬」 박종규 실장은 물론 저돌적인 차지철 실장과도 대체로 친선을 유지했다.
김정렴씨는 그의 영역 불가침론을 이렇게 설명했다.
『박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비서실·경호실·정보부 3대 권력기관은 제각기 할일을 철저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서실은 비서실이고 경호실은 경호실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박 실장도 차 실장도 나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고 나도 경호실문제엔 참견하지 않았습니다. 수석들에게도 누구든지 비서실 영역을 침범하면 막도록 했습니다.』
김 실장은 특히 HR와 박 실장이 다툼을 벌였던 의전상 서열문제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당시 비서실에 근무했던 P씨의 증언. 『의전상 비서실장이 경호실장보다 서열이 위지만 김 실장은 대통령 경호를 위해선 경호실장이 대통령 바로 곁에 붙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행사장에 입장할 때나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경호실장이 앞서도록 했죠. 차지철 실장 때 월간경제동향보고회 같은 행사에서 경호를 이유로 그가 서열이 높은 우배석을 해도 개의치 않았어요.』
김 실장은 특히 박 실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나이로는 여섯 살 위였지만 박 실장을 「청와대 선임자」로 대우했고 박 실장은 나름대로 박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다고 믿어 비서실을 누르려는 등의 오버액션을 하지 않았다.
당시 박 실장과 가깝게 지냈던 비서관 S씨의 회고.
『70년 10월 해군훈련 참관차 박 대통령을 모시고 출장을 갔는데 군함 안에서 김 실장과 박 실장이 바둑을 두면서 서로 백을 잡겠다고 우겼죠. 승강이 끝에 김 실장이 「그럼 선임자가 백 잡아」라고 하자 박 실장은 「나이가 많으시니 백을 잡으시라」고 양보하더군요.』
김 실장은 경호실과의 친선 유지에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고위장성 출신이었던 경호실 간부들에게는 우호의 제스처로 군대식 경례를 하기도 했고 현 민자당 전국구의원인 L 모 차장보 같은 간부들에게는 용돈을 듬뿍 쥐어주기도 했다.
김 실장의 이같은 처신 덕분에 비서실장과의 신경전에서 벗어난 박 실장은 경호실 기반을 착실히 다지면서 나름대로 「각하 모시기」에 정력을 쏟았다.<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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