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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 팔고 임금 반납해 38조 적자 메꾼다? "한전의 궁여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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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시 빛가람동에 있는 한전 본사 사옥의 모습. 연합뉴스

전남 나주시 빛가람동에 있는 한전 본사 사옥의 모습. 연합뉴스

38조원. 지난해부터 올 1분기까지 한국전력공사가 떠안은 천문학적인 적자 규모다. 이런 한전이 12일 대대적인 자구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 여의도 ‘알짜 부동산’을 매각하는 등 25조원대 재무 개선안을 내놨고 정승일 한전 사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충분한 수준의 전기요금 인상이 동반되지 않으면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정 사장은 이날 ‘전기요금 정상화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통해 “오늘(12일) 자로 한전 사장직을 내려놓고자 한다”며 밝혔다. 여권에서 한전 경영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장이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한 지 15일 만이다. 정 사장은 한국가스공사 사장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거쳐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5월 한전 사장으로 임명됐다. 아직 임기가 1년 남아있지만, 한전이 ‘뼈를 깎는 쇄신’을 요구받는 상황에서 사퇴를 선택했다.

 12일 오전 전남 나주시 빛가람동 한국전력공사 비전홀에서 정승일 사장이 '비상경영 및 경영혁신 실천 다짐대회'에 자리하고 있다. 정 사장은 이날 한전의 적자난 해소 자구책 발표에 맞춰 사의를 표명했다. 연합뉴스

12일 오전 전남 나주시 빛가람동 한국전력공사 비전홀에서 정승일 사장이 '비상경영 및 경영혁신 실천 다짐대회'에 자리하고 있다. 정 사장은 이날 한전의 적자난 해소 자구책 발표에 맞춰 사의를 표명했다. 연합뉴스

정 사장은 “당분간 한전의 경영진을 중심으로 비상경영체제를 운영하고, 다가오는 여름철 비상전력 수급의 안정적 운영과 작업현장 산업재해 예방에도 만전을 기할 것”이라며 “한전은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절감하며, 국민 여러분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기 위해 오늘 발표한 자구 노력과 경영 혁신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창사 이래 최대’ 25조원 규모 자구안…가스공사도 동참

한전은 이날 25조7000억원 규모의 자구안도 함께 발표했다. 창사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재무 개선 계획이라고 한전은 설명했다. 올 초 발표한 20조1000억원에서 5조원가량 늘어났다.

한국전력공사 및 한국가스공사 자구책

한국전력공사 및 한국가스공사 자구책

우선 수도권 대표자산인 여의도 남서울본부를 매각하고, 매각이 여의치 않은 강남 한전아트센터는 3개층을 임대하기로 했다. 한전은 “기존 재정 건전화 계획상 매각 대상 44개소 외에도 ‘매각 가능한 모든 부동산을 매각한다’는 원칙”이라며 “추가 임대자산도 지속 발굴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임직원 급여·성과급도 일부 내놓기로 했다. 2직급(부장급) 이상 임직원은 임금 인상분 100%를, 3직급(차장급) 이상 임직원은 50%를 반납한다. 성과급도 경영평가 결과가 확정되는 다음 달에 1직급(실장급) 이상은 전액, 2직급 이상은 50% 반납하기로 했다. 4직급 이하 전 직원도 노사 협의를 거쳐 급여 반납에 동참하도록 독려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조직 효율화 차원에서 인력을 재배치하고, 전력 구입비도 줄여나가기로 했다.

이날 한국가스공사도 15조4000억원 규모의 추가 자구안을 발표했다. 한전과 마찬가지로 임직원 임금 인상분을 반납하고 국내 가스 수급 안정에 직접 영향이 없는 사업비는 이연하거나 축소하기로 했다. 최연혜 가스공사 사장은 “가스요금과 관련해 국민 여러분에게 부담을 드려 송구하다”며 “앞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을 이행해 국민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공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38조 적자’ 메꾸기 부족한 자구안…‘임금 반납’ 노조 반발 예고

하지만 이번 자구안만으로 불어날 대로 불어난 한전 적자난이 해소하긴 어렵다. 이날 한전은 올 1분기 결산 결과 영업손실 6조1776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연료비와 전력 구입비가 크게 증가한 탓이다. 지난해 한 해 발생한 32조원대 영업손실까지 더하면 1분기 기준 누적 적자는 벌써 38조원을 넘어섰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이번 자구안이 오히려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장은 “예컨대 매각 대상인 남서울본부는 지금도 한전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만약 매각 이후 사무실을 임대해서 쓰게 된다면 ‘조삼모사’가 될 수 있다”며 “당장은 큰 목돈이 들어올 수 있지만, 길게 보면 오히려 국가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결정”이라고 짚었다.

4직급 이하 임직원의 임금 반납 독려도 벌써 거센 내부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전국전력노조 함규식 사무처장은 “우선 사측 협의 요청은 거부했다. 안 그래도 ‘방만 경영’ 프레임으로 몰아가서 직원 사기가 떨어져 있는데, 2%도 안 되는 인건비마저 일부 반납하자고 조합원들을 설득할 명분이 없다”며 “국민 부담을 줄이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내부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 “전기요금 현실화가 먼저”

전문가들은 전기요금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소책이라고 입을 모았다. 앞서 산업부는 한전 자금난 해소를 위해 올해 킬로와트시(㎾h)당 51.6원 인상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올 1분기에 13.1원 올리는 데 그쳤다. 당정은 이르면 다음 주 초 2분기 인상 폭을 결정할 계획이지만, 이마저도 7원가량 인상하는 데 그칠 것으로 보인다.

강천구 인하대 에너지자원공학과 초빙교수는 “강더위가 예고된 여름철이 다가오기 전에 전기요금을 최소 1분기 인상 폭(13.1원)보단 크게 올려야 한다”며 “3·4분기로 갈수록 총선 이슈와 맞물리면서 인상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전기요금 현실화는 적자 경영을 해소하는 측면도 있지만, (높은 인상을 통해) 국민에게 에너지 위기 심각성을 알리고 절약을 유도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승훈 학장도 “한전이 방만해서 생긴 문제가 아닌데도 자구 노력만 요구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밖에 되지 않는다”며 “적자 해소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전기요금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다. 정치 논리를 배제하고 인상 폭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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