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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천밍런, 국민당 군 8만명 이끌고 와” 개국상장 추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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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3〉

1949년 2월, 동북을 점령한 린뱌오의 ‘제4야전군’은 화북야전군과 합세, 톈진(天津)을 점령하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에서 열린 ‘제4야전군’ 환영 음악회. [사진 김명호]

1949년 2월, 동북을 점령한 린뱌오의 ‘제4야전군’은 화북야전군과 합세, 톈진(天津)을 점령하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에서 열린 ‘제4야전군’ 환영 음악회. [사진 김명호]

1955년 9월 27일, 신중국 최초의 군 계급 수여식이 열렸다. 그간 선정 과정이 복잡했다. 30여년간 전쟁터만 누빈, 사연 많은 사람이 대상이었다. ‘엄격한 기준’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역사 용어가 된 ‘10원수10대장(十元帥十大將)’ 원수 10명과 대장 10명 선정부터 애를 먹었다. 소문을 퍼뜨렸다. “대장들도 원수 자격이 충분한 장군들이다. 원수와 대장은 ‘개국원수’와 ‘개국대장’에 한 한다. 평화 시대에 대장 계급은 합당치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상장(上將) 중, 각 분야 지휘관에게 대장 계급장 달아준다.” 상장과 대장도 그게 그거라는 소리였다.

‘개국상장’ 57명은 공통점이 있었다. 중앙홍군에서 시작해 장정, 항일 전쟁, 국·공 전쟁, 6·25 전쟁 참전(항미원조)을 거친 ‘병단사령관’이나 병단급 사령관이 대부분이었다. 우리의 군단 격인 ‘군(軍)’의 군장(軍長)들은 소장, 혹은 중장 계급을 받았다. 인간 세상이다 보니 예외가 있었다. 원래 개국상장으로 확정된 사람은 55명이었다. 마오쩌둥이 2명을 추가했다. 그중 한 명이 천밍런(陳明仁·진명인) 이었다.

린뱌오·천밍런, 계급 수여식 불참

장제스와 천밍런. 1946년 3월, 난징(南京). [사진 김명호]

장제스와 천밍런. 1946년 3월, 난징(南京). [사진 김명호]

소장 확정자 명단을 보던 마오가 천밍런 세 글자를 발견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견을 냈다. “해방 전쟁(국·공 전쟁) 시절, 우리에게 린뱌오(林彪·임표)가 있었던 것처럼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겐 천밍런이 있었다. 네 차례에 걸친 ‘쓰핑전역(四平戰役)’에서 린뱌오의 10만  대군도 천밍런이 지휘한 2만 명의 국민당 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1차는 린뱌오, 2차와 3차는 천이 승리했다. 4번째는 린뱌오가 이겼지만, 적 지휘관은 천이 아니었다. 귀때기 얇은 장제스의 엉뚱한 포상 덕에 국민당 군 8만 명 이끌고 우리쪽으로 왔다. 내가 제안한 병단사령관 거절하며 군장을 자청했다. 나는 병단사령관과 같은 예우 외에는 보답할 방법이 없었다.” 끝으로 단언했다. “중장도 부족하다. 상장이 마땅하다. 파격이 아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마오가 “지휘력이나 전술이 린뱌오가 천밍런 만 못하다”는 말도 했다고 하지만 소문일 뿐, 확인할 방법은 없다. 확실한 것은 있다. 계급 수여식 날 린뱌오는 병 핑계를 댔다. 원수 계급장 받으러 나오지 않았다. 천밍런도 마찬가지였다. 식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유가 평범했다. 그냥 가기 싫었다.

마오쩌둥은 천밍런만 만나면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 천도 마찬가지였다.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은 천밍런만 만나면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 천도 마찬가지였다. [사진 김명호]

천밍런은 1903년, 개나리꽃이 질 무렵 후난(湖南)성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21세 때 광저우(廣州)에 군사학교(육군강무학교)가 문 열었다는 소식 듣고 흥분했다. 광저우에 갔지만 낭패였다. 학생모집이 끝난 후였다. 중학 성적표 들고 교장 집 문전에서 죽쳤다. 교장 청첸(程潜·정잠)은 용모가 준수한 청년이 맘에 들었다. 학교 성적표는 보지도 않았다. 고향이 문제였다. 방법을 일러줬다. “동향 청년은 뽑지 않겠다고 내 입으로 큰소리쳤다. 고향만 바꿔 적어라.”

1924년 9월, 광무학교는 황푸군관학교와 합병했다. 얼떨결에 황푸 1기생이 된 천밍런은 동기 두위밍(杜聿明·두율명)과 죽이 맞았다. 황푸 생도들은 수업과 전쟁을 병행했다. 천은 겁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목숨 건 도박과 다를 바 없었다. 상관이 “나는 내가 세계에서 가장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너는 나보다 더하다” 며 어깨 두드려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두위밍 “천밍런, 린뱌오와 해볼 만”

장제스의 명령으로 동북을 뒤로한 두위밍은 화이하이 전역(淮海戰役)에서 대패했다. 부관과 함께 산간 지역 전전하다 포로로 전락했다. [사진 김명호]

장제스의 명령으로 동북을 뒤로한 두위밍은 화이하이 전역(淮海戰役)에서 대패했다. 부관과 함께 산간 지역 전전하다 포로로 전락했다. [사진 김명호]

1925년 10월 중순, 천밍런은 황푸 교장 장제스와 교육장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두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계기는 전쟁이었다. 후이저우성(惠州) 공략이 시작되자 평소처럼 깃발 들고 냅다 뛰었다.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었는지 총알이 피해 가는 것 같았다. 성루(城樓)에 올라가 혁명군 깃발을 좌우로 흔들었다. 망원경 들고 현장을 지휘하던 장제스가 부관에게 망원경을 넘겼다. “누군지 확인해라.” 참모들이 법석을 떨었다. 저우언라이가 가장 민첩했다. “교장의 학생 천밍런입니다.”

장제스는 천밍런을 중용했다. 천도 북벌 전쟁과 항일 전쟁에서 장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일본 패망 8개월 후 두위밍이 장에게 천을 추천했다. “천밍런이라면 린뱌오와 해볼 만하다.” ‘71군’ 이끌고 동북에 온 천은 ‘스핑전역’에서 린뱌오를 궁지에 몰아넣고 스핑을 사수(死守)했다. 병단사령관으로 승진한 천의 명성이 사해(四海)에 자자했다. 두위밍 후임으로 동북에 부임한 천청(陳誠·진성)이 꼴을 못 봤다. 장제스에게 고자질했다. “천밍런은 미국과 관계가 깊다.” 장은 미국에 의존하면서도 미국과 가까운 사람을 싫어했다. 천청에게 전문을 보냈다. “천밍런의 보직을 해임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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