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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린뱌오 증병 요청에 “열사 많을수록 인민 지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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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2〉

양더즈(왼쪽 여섯째)는 린뱌오가 탐낼 만했다. 6·25 전쟁 정전 후 지원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문혁 시절에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총참모장 재직 기간도 신중국 역사상 가장 길었다. [사진 김명호]

양더즈(왼쪽 여섯째)는 린뱌오가 탐낼 만했다. 6·25 전쟁 정전 후 지원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문혁 시절에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총참모장 재직 기간도 신중국 역사상 가장 길었다. [사진 김명호]

1905년 9월, 일본군이 지린(吉林)성 스핑(四平)에 주둔 중인 러시아군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스핑을 일본에게 빼앗긴 러시아는 1년 8개월간 지속된 전쟁의 패배를 인정했다.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장제스 “스핑 없으면 동북 없는 것과 같다”

린뱌오는 붓글씨를 즐겼다. [사진 김명호]

린뱌오는 붓글씨를 즐겼다. [사진 김명호]

40년이 흘렀다. 1946년 3월부터 2년간, 4차에 걸쳐 스핑이 국·공 양당의 대규모 전쟁터로 변했다. 스핑은 3개의 철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1946년 3월 중순, 린뱌오(林彪·임표)가 지휘하는 동북민주연군이 소련군이 철수한 스핑에 깃발을 꽂았다. 마오쩌둥이 린에게 품위 있고 무지막지한 전문을 보냈다. “7년 전 이맘때 바르셀로나를 점령한 프랑코가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화려한 꽃들이 자태를 되찾고 스페인 내전도 종지부를 찍었다. 스핑은 중국의 마드리드다. 희생자가 수만 명 나더라도 결사 보위해라.” 인명 경시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마오와 별 차이 없었다. 스핑 얘기만 나오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우리에게 스핑이 없으면 동북도 없는 것과 진배없다.”

린뱌오는 달랐다. 스핑을 한 그루 나무에 비유했다. “스핑이라는 고목에 나와 부하들 목을 매달고 싶지 않다.” 중공 동북국을 통해 마오쩌둥에게 야전 지휘관 증원을 요청했다. 부하로 두면 든든할 사람이 2명 있었다. “신사군(新四軍) 소속 예페이(葉飛·엽비)와 현재 화베이(華北)에 있는 양더즈(楊得志·양득지)의 부대를 동북으로 보내주기 바란다.” 마오의 답전은 린뱌오가 예측한 대로였다. “증병은 기대하지 마라. 우리가 전쟁을 도발했다는 빌미를 주는 격이다. 현재 국민당은 마셜의 압박으로 정전을 준비 중이다. 상대가 먼저 우리를 공격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하다. 보위에만 힘써라. 희생이 많아도 어쩔 수 없다. 열사가 많을수록 인민은 우리를 지지한다.” 린은 복종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핑보위전 참전을 자원한 조선족 청년들. [사진 김명호]

스핑보위전 참전을 자원한 조선족 청년들. [사진 김명호]

주력을 이동시킨 린뱌오는 스핑 교외 리수쩐(梨樹鎭)에 도착했다. 배꽃(梨花)이 만발하는 계절이었다. 작은 마을 도처에 배나무 고목이 널려있었다. 방을 구하라고 지시했다. “회의가 가능한 넓은 방 있는 집을 찾아봐라. 창문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 사회주의 혁명은 계급혁명이다. 지금은 전시(戰時)다. 계급은 따지지 마라. 부잣집이라야 넓은 방이 있다.” 마을 지주 류(劉)씨 집 방 한 칸을 빌렸다. 집주인 류추이핑(劉翠萍·유취평)은 화사한 중년의 과부였다. 훗날 구술을 남겼다. “오전 9시경 군복 차림의 사내가 마당에 나타났다. 눈에 총기가 가득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청년이 커다란 케이크 상자를 내 하녀에게 전달하자 군인이 입을 열었다. ‘전쟁 중이라 마땅한 선물 구하기가 힘들었다. 보잘것없는 물건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나는 흔해 빠진 장교 정도로 여겼다. 고개 끄덕이며 웃음으로 답했다.”

공격에 능한 린뱌오, 방어 능력은 부족

린뱌오의 식습관은 소박했다. 항일 전쟁 시절 미군들과 함께한 보기 드문 식사 광경. [사진 김명호]

린뱌오의 식습관은 소박했다. 항일 전쟁 시절 미군들과 함께한 보기 드문 식사 광경. [사진 김명호]

방을 둘러본 린뱌오는 만족했다. 문턱에 앉아 여주인과 대화를 나눴다. 전사들이 몰려왔다. 마당 쓸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물 얻어다 집 안 청소에 분주했다. 여주인 류추이핑은 호기심이 동했다. 조심스럽게 이름을 물었다. “린뱌오라고 합니다” 한마디에 여주인의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천하의 린뱌오가 내 앞에 있다니.” 벌떡 일어나 큰절하고도 감히 일어나지를 못했다. 린뱌오가 황급히 일으켜 세웠지만 고개 숙인 채 미동도 안 했다. 린뱌오가 입을 열었다. “나만 먼저 왔다. 며칠 후 가족과 애들이 오면 번잡한 일이 많을까 우려된다. 내 집무실은 가까운 곳에 따로 마련했다.” 8일 후, 예췬(葉群·엽군)이 2살이 채 안 된 딸과 포대에 싸인 아들 안고 리수쩐에 왔다. 집주인 류추이핑의 환대는 친형제 자매보다 더했다. 온종일 같이 놀며 같은 밥을 먹었다.

린뱌오는 공격에 능했다. 방어는 해본 적이 없고, 능력도 부족했다. 1946년 4월 18일부터 5월 18일까지 벌어진 ‘스핑보위전’에서 병력 10만 명을 잃고 퇴각했다. 류추이핑의 구술 한 구절을 소개한다. “배꽃이 지자 린뱌오도 떠났다. 수채화 같던 짧은 시간은 한 편의 서정시였다.”

2년 후 ‘4차 스핑전역(戰役)’에서 린뱌오는 전신(戰神)의 진면목을 발휘했다. 여세를 몰아 동북 전역을 장악했다. 국·공 전쟁 승리의 초석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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