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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공작 천재’ 다이리 비행기 추락사, 장제스 패배 불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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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1〉

국·공 전쟁 시절 양복 차림으로 칭다오(靑島) 해안에 나타난 리커농. [사진 김명호]

국·공 전쟁 시절 양복 차림으로 칭다오(靑島) 해안에 나타난 리커농. [사진 김명호]

1993년 여름, 중국에 이런 소문이 난무했다. “미국에서 구입한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강택민)의 전용기에 총리 리펑(李鵬·이붕)이 설치한 도청장치 200여 개가 발견됐다.” 중국 외교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11월 초, 미국을 방문한 장쩌민은 선물 보따리를 한아름 안고 귀국했다. 대륙소식 보도로 유명세를 탄 홍콩 월간지의 기사가 주목을 끌었다. “장쩌민의 미국 방문을 앞둔 중국 지도부는 실리를 추구했다. 예견했던 미국의 도청기 설치를 리펑이 뒤집어쓰기로 합의했다.” 말미에 30년 전 세상 떠난 전설적인 인물을 거론했다. “리커농(李克農·이극농)의 결정을 보는 듯하다.”

“미국의 도청기 설치, 리펑이 뒤집어써”

항일 전쟁 시절 다이리(왼쪽)는 미군과 함께 설립한 정보기관 ‘중·미합작소’의 대표였다. 오른쪽은 부대표였던 미 해군 대령. [사진 김명호]

항일 전쟁 시절 다이리(왼쪽)는 미군과 함께 설립한 정보기관 ‘중·미합작소’의 대표였다. 오른쪽은 부대표였던 미 해군 대령. [사진 김명호]

역사가 된 리커농을 끄집어내자 호사가들은 입이 근질근질했다. 다이리(戴笠·대립)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리커농의 상대였던 군통(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국장 다이리는 1946년 3월 24일 비행기 추락으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었더라면 장제스(蔣介石·장개석) 대륙에서 절대 패하지 않았다.” 대만 참모총장과 행정원장을 역임한 하오보춘(郝柏村·학백촌)도 동의했다. “다이리의 조난은 반공 전쟁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공산당에 침투해 잠복 활동 하던 군통 요원들은 다이와 단선관계였다. 다이가 죽자 허공에 뜬 신세가 돼버렸다. 중공에 헌신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이는 특무공작의 천재였다.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다이의 사망이었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린뱌오(林彪·임표)가 지휘하는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聯軍) 내에도 군통특무들이 잠복해 있었다. 다이 사망 전까지는 동북에서 국군이 우세했다. 마셜은 총통을 압박만 했지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1946년 6월 6일 마셜이 요구한 두 번째 종전 요구를 어쩔 수 없이 수락한 후 총통은 지하에 있는 다이가 그리웠다. 부인과 함께 유해가 안치된 영곡사(靈谷寺)에 갔다. 직접 제(祭) 올리며 영혼을 달랬다. 나는 총통이 그날처럼 애통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동북민주연군(제4야전군)의 중요지휘관들. 왼쪽부터 린뱌오, 가오강(高崗), 뤄룽환, 류야러우. 왼쪽 첫째는 문혁 후 총참모장을 역임한 황커청(黃克誠). [사진 김명호]

동북민주연군(제4야전군)의 중요지휘관들. 왼쪽부터 린뱌오, 가오강(高崗), 뤄룽환, 류야러우. 왼쪽 첫째는 문혁 후 총참모장을 역임한 황커청(黃克誠). [사진 김명호]

동북민주연군에는 사령관 린뱌오와 정치위원 뤄룽환(羅榮桓·나영환), 두 명의 지휘관이 있었다. 참모장은 애초부터 없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 동북보안사령관 두위밍(杜聿明·두율명)이 지휘하는 국민당 군을 격파하기까지는 두가 입원 중이라는리커농의 정보가 결정적이었다. 뤄룽환도 환자였다. 린은 정치위원 동의 없이 전투를 결정했다. 당시 뤄는 평양의 소련군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회고록 일부를 소개한다. “김일성 부부가 수시로 병문안을 왔다. 슈수이허즈(秀水河子)에서 승리했다는 소식도 김일성이 선물한 라디오를 듣고 알았다. 김일성의 부인은 세심한 여자였다. 내가 후난(湖南) 출신이라는 것 알고 배추에 고춧가루와 온갖 양념 버무려 들고 왔다. 맛이 기가 막혔다. 소련 군의관에게 간암 판정을 받았다. 평양에는 수술 시설이 없었다. 병원장이 모스크바에 갈 것을 권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 전문을 보냈다. 크레믈린 병원에서 치료와 수술을 전담하겠다는 답전이 왔다. 중도에 다롄(大連)의 소련군병원(전 만철병원)에서 한동안 보수적인 치료를 받았다.”

‘린·궈·류’ 훗날 제4야전군 3거두 우뚝

보급품을 수송하는 동북민주연군 치중대(輜重隊). [사진 김명호]

보급품을 수송하는 동북민주연군 치중대(輜重隊). [사진 김명호]

뤄룽환은 다롄의 소련군 병원에서 훗날 ‘신중국 공군의 아버지’를 만났다. 하루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소련군 소교(少校) 복장의 중국인이 침상 옆에 서 있었다. 내려다보며 웃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자 나를 모르다니! 자세히 보라며 군모를 벗었다. 뤄는 흥분했다.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류야러우(劉亞樓·유아루)! 내가 류야러우를 몰라보다니. 네가 러시아 빵 많이 먹은 탓에 내가 못 알아봤다.” 류는 장정시정홍1군단 사단장이었다. 항일 전쟁 초기 린뱌오의 권유로 소련으로 갔다. 명문 군사학교 마치고 독·소전에 참전해 공을 세운 인재였다. 소련군 일원으로 동북에 진입했다. 명의상으로만 소련군 소교였다. 실제 하는 일은 동북민주연군과 소련군 간의 연락장교였다. 동북민주연군에 복귀를 희망하자 뤄도 환영했다. “당장 당 중앙과 린뱌오 사령관에게 전문을 보내겠다.” 리커농의 근황도 알려줬다. “지금 베이핑(北平)의 군조부(군사조종부) 집행부에 있다.” 류야러우는 소련군복을 벗었다. 동북민주연군 참모장으로 국·공 전쟁에 몸을 던졌다. 훗날 ‘린·궈·류’로 중국 전쟁사를 수놓을 ‘제4야전군’의 3거두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두위밍도 환자였다. 의사가 콩팥 수술을 권했다. 장제스는 의심의 벽이 있었다. 개는 믿어도 사람은 믿지 않았다. 무장 병력 거느린 지휘관들에겐 특히 심했다. 두가 린뱌오와의 전쟁을 피한다는 생각이 들자 다이리를 불렀다. 두의 병실에 다이가 나타났다. “내일이 수술이라고 들었다. 의사가 고령이다. 수술을 연기해라.” 거절당하자 군말 없이 자리를 떴다. 그날 밤 주치의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두의 증세를 상세히 물었다. 의사는 솔직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안심했다. 거의 같은 시간 린뱌오는 리커농이 보낸 암호 전문을 받았다.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훗날, 제네바에서 리커농이 외교부 차장 차오관화(喬冠華·교관화)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국·공 전쟁(중공에서는 해방전쟁) 시절 국민당 군 지휘관 옆에는 우리 편이 없는 곳이 없었다. 특히 작전 참모는 거의 우리 사람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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