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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YS의 실책, 여당 무기력, 야당 비협조…외환위기 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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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20〉 1997년 외환위기 피할 수 없었나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금고를 열어 보니 빚문서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1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했던 말이다. 국민과의 대화에서 외환보유액이 바닥난 상황을 ‘텅 빈 금고’에 비유했다. 김 당선인은 이렇게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던 사정을 설명하며 고통 분담을 요청했다.

과연 외환위기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찾고 싶었다. 2006년 8~9월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있을 때다. 노 대통령은 외환위기 10년을 앞두고 당시 상황을 면밀하게 점검해 보라고 지시했다. 누군가를 비난하며 책임을 돌리기보다 미래를 위한 시사점을 얻자는 취지였다. 나는 강경식 전 부총리 등 여러 관계자를 직접 접촉하고 관련 자료를 분석했다.

그때 정책실에서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결론은 이랬다. “만일 김영삼 대통령과 정치권이 제대로 뜻을 모았다면 외환위기를 막을 기회가 있었다. 적어도 국민적 고통을 최소화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는데 안타깝게 놓쳐버렸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국정운영 실패, 여당의 무기력, 야당의 무관심과 비협조 등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97년 외환위기 막을 수도 있었다”
노무현 때 재점검한 뒤 내린 결론
북한 붕괴 대비한 30일 비상계획
IMF 구제금융 신청할 때 써먹어

강경식 “IMF 지원 절차 어떻게 되나”

1997년 12월 3일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한국 정부가 협상 결과를 공동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임창열 경제부총리,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중앙포토]

1997년 12월 3일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한국 정부가 협상 결과를 공동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임창열 경제부총리,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중앙포토]

1997년 김영삼 정부의 임기 마지막 해는 출발부터 불안했다. 1월 23일에는 한보철강이 5조원대 빚을 갚지 못하고 부도를 냈다. 대기업 연쇄 부도의 서막이었다. 그보다 1주일 전에 나는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국제협력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남북 경제교류와 미국 등 선진국과의 경제협력이 주 업무였다.

그해 3월 김 대통령은 강경식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에게 경제 사령탑을 맡겼다. 원래 강 부총리는 그 자리를 맡지 않으려고 했다. 위기 조짐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정권 임기 말이란 점도 부담스러워 했다. 그는 1983년 전두환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14년 만에 국무위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자연스러운 인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현확 전 총리가 강력히 입각을 설득했다고 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 책임을 피해서야 되겠느냐”는 얘기였다. 강 부총리는 신 전 총리의 조카사위다.

그 무렵 북한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극심한 식량난 속에 북한 붕괴론이 널리 퍼졌다. 어느 날 나는 비밀 지시를 받았다.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대비해 30일 비상계획을 마련하라고 했다. 만일 북한이 무너진다면 최초 30일 동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미리 대책을 세워두라는 뜻이었다.

나는 세부 내용을 정리해 강 부총리에게 보고했다. 그중에 외환위기에 관한 부분이 있었다. 요약하면 이런 얘기였다. ‘북한이 갑자기 붕괴하면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생기면 IMF에 신속한 자금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사실 IMF 구제금융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외환이나 국제금융 담당이 아니었다. ‘북한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까. 형식적으로 북한의 긴급 사태에 대비하고 있자는 취지가 아닐까.’ 이게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강 부총리는 예상 밖으로 진지하게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묻고 또 물었다.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려면 어떤 절차를 따라야 하겠나. 금액은 얼마나 받을 수 있겠나.” 나는 대답하는 데 진땀을 흘렸다.

나중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나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그때 강 부총리는 북한보다 우리나라의 긴급 사태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북한 붕괴 관련 대책을 외환위기 대책으로 사용한 셈이다.

희생양 필요했던 외환위기 조사

강경식

강경식

공무원도 운에 따라 성공과 좌절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뒤 나는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감사원은 경제 부처에서 위기 관련 보고를 제대로 했느냐를 따졌다. 국제협력관 업무에는 해외 대사관에서 보내온 경제 관련 전문을 챙기는 것도 있었다. 당시 외무부(현 외교부)와의 힘겨루기 끝에 재경원으로 가져온 업무였다. 해외 대사관에서 위기 경고를 보낸 게 하나라도 있었는지, 내가 그걸 챙겼는지가 감사의 초점이었다.

그때 해외 대사관에선 하루에도 30~50건의 전문을 보내왔다. 감사 대상이 된 전문을 모두 합치면 수천 건이었다. 일일이 내용을 검토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결재란에 내가 서명해야 했다. 그 후 담당 과에서 검토한 뒤 중요한 건 다시 나에게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내가 내용도 알지 못하고 결재한 전문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위기를 경고한 전문이 발견되면 나는 보고 누락 책임을 뒤집어쓸 판이었다. 그런 전문은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 나로선 천만다행이었다.

외환위기 발생 이후 누군가는 희생양이 돼야 했다. 강경식 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화살을 맞았다. 두 사람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를 뒤집어썼다. 나중에 법원 판결에서 보고 누락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어쨌든 두 사람은 검찰의 별건 수사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한참 뒤 대법원에 가서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원래 강 부총리는 대권에도 뜻이 있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두 번 당선했다. 지금은 없어진 PC통신과 인터넷을 활용해 ‘네트워크21’이란 사이버 정당을 만들기도 했다. 온라인으로 네티즌의 정책 제안도 받는 등 당시로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외환위기 재판으로 홍역을 치르고 나니 정치적으로 재기하기가 어려웠다.

부처 통합으로 위기 대처 능력 저하

1997년 가을 정기국회에서 금융개혁 법안 처리가 무산된 것도 사태를 악화시킨 요인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 집중적으로 검토했던 외환위기 당시 상황 중에는 이 부분도 있었다.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대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해 법안 처리에 반대했다. 여당인 신한국당도 법안 처리에 소극적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하면서 정부와 여당의 협조 채널도 끊어져 버렸다.

그 무렵 강경식 부총리와 강만수 재경원 차관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해마다 11월이면 예산 관련 부처 장·차관은 국회에서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새해 예산안과 세법 개정안 심의가 몰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급했던 건 IMF와의 협의 등 외환위기 대책 마련이었다. 게다가 금융개혁 법안 처리를 위해 의원들을 설득하는 노력도 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강 차관에게 중국 출장 일정이 잡혔다. 한·중 경제차관 회의와 두만강 유역 개발계획(TRADP) 정부 간 조정위원회였다. 국제협력관인 내가 강 차관과 동행하는 계획이었다. 국회 일정 등에 쫓겼던 강 차관은 중국 출장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급기야 강경식 부총리까지 경질되면서 강 차관은 1박2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강 차관의 정신없이 바쁜 모습은 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김영삼 정부에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합친 게 결과적으로 위기 대처 능력을 떨어뜨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예전처럼 두 개 부처에 각각 장·차관을 뒀다면 위기 상황에서 일을 분담하기가 훨씬 나았을 것이다.

노무현 “기획예산처는 그대로 두라”

이듬해 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재경원을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로 분리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4년 정부 조직을 일부 개편했다. 원안에는 기획예산처와 재경부를 다시 합치는 방안이 있었다. 김병준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이 개편안 작성을 주도했다.

당시 기획예산처 차관이던 나는 노 대통령에게 다시 합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국회를 전담하는 예산 장관’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댔다. “두 부처를 합치면 겉으로는 비용이 절감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 수준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외환위기 때 있었던 일을 자세히 전했다.

노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다. “기획예산처는 내가 직접 시킬 일이 있으니 그냥 놔두세요.” 노 대통령은 이런 말로 두 부처의 통합을 없던 일로 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며 두 부처를 기획재정부란 이름으로 다시 합쳤다. 대신 기재부 차관을 두 명 두는 것으로 했다. 이렇게라도 하면 장관이 급한 일에 쫓길 때 두 명의 차관이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어느 정부든 경기 부양의 유혹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다. 노태우 정부는 ‘3저 호황’ 속에서 경제 거품을 즐기다가 김영삼 정부 초기에 경기 침체를 불러왔다. 김영삼 정부는 ‘신경제 100일 계획’ 등 무리한 경기 부양책을 계속 쓰다가 초유의 외환위기를 겪었다. 김대중 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용카드 규제를 대폭 풀었다가 막대한 신용불량자와 카드부실 사태를 노무현 정부에 떠넘겼다.

그런 와중에 경기 부양의 거품조차 붙들지 못한 서민은 극심한 피해를 봤다. 정치적 목적의 경기 부양은 일시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를 어렵게 하고 국민을 고통스럽게 한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