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상 좋게도 좀 봅시다/고병익(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서울시내에서 불법주차에 대한 일제단속을 단행하게 되자 거리의 차량소통이 한결 나아졌다고 신문들이 보도한다. 시내에 차를 세워둘 수가 없게 되니 웬만한 사람은 모두 차를 집에 두고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때문에 거리의 차량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등산인들에게 등산로를 제한하고 산중에서의 취사를 일체 금지해서 음식장만을 못 하게 했더니 쓰레기로 몸살을 앓던 산속이 한결 깨끗해지고 숲들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고 텔레비전뉴스가 전한다.
○숨통 트이는 밝은 뉴스
온통 세상이 폭력과 범죄와 혼란의 난장판이 되었다고 하는 개탄의 소리가 근래에는 몇 사람의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절실한 우려의 신음소리가 되어버렸다. 절도·날치기 같은 것은 말할 것 없고,청소년들의 성폭행과 강도질,부녀자나 성인 남자 할것없이 납치해서 폭행하고,심지어 잡아가서 인신매매를 해버린다는 일이 바로 누구나의 주변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로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들판과 산악들이 온통 쓰레기로 뒤덮이고 하천들이 오염된 폐수로 죽어만 가는 판이다.
이런 판국에 무엇이든 좋아진 현상이 생겼다는 보도는 그래도 한가닥의 숨통을 틔워주는 소식이 된다. 다만 그 숨통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금지와 단속의 서슬이 시퍼렇게 작용할 때 뿐이고 곧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로 되돌아갈 우려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에 대해서 일시적인 처방과 수술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치료방책을 과감하게 실시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 일반국민들도 그런 현상이 자기에게 직접 관계가 적다하여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철저한 비판자와 감시자가 되어서 정부와 사회를 채찍질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네 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전통을 옛날부터 별로 갖지 못했다. 늘 그 옛날의 어떤 시기가 좋았고 현재는 그때보다 인심도 각박해지고 기강도 문란해졌다고 생각하는 그런 고대숭상의 풍조가 흐르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성인과 현군들이 옛날에 이상적인 정치를 베풀었으니 늘 그것을 칭송하고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되고 있었으며,심지어 새로운 개혁운동조차도 새 것의 창조가 아니라 옛 것으로의 복고를 목표로 한다고 표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임을 한대의 왕망이나 송대의 왕안석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 근세에는 다산 정약용같이 비교적 분명하게 시대의 진보를 인식한 학자도 있다. 그는 비록 기술과 군기 등에 관한 부면에 한정된 일이기는 하지만 수백년래로 중국에서 새로운 기술이 서양으로부터 도입되어 날로 발전하고 있고 일본과 유구까지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우리도 이에 대처하지 않으면 훗날에 홍이포 앞에 무릎을 끓고 말 것이라고 경고 하면서 세상의 변천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유교 윤리와 시문에 대한 관심만 높았던 일반 학자들은 옛날에의 회고에 기울어진 자세를 버리지 못하였다.
○돋보인 다산의 진보관
이에 비해서 유럽에서는 이른바 진보사관이 지배적인 사조가 되어왔다. 프랑스대혁명 때의 콩도르세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10단계로 나누어 그 발전이 일직선으로 무한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나간다고 주장하였고,헤겔은 인간이성이 변증법적 방식으로 발전해나간다는 이치를 내세웠고,마르크스는 이를 뒤집어서 물질적인 제조건에 적용시켜서 사회변화의 법칙을 구성하였다.
물론 동시대의 독일 역사학자 랑케같은 사람은 어떤 시대도 우열을 논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시대는 자체대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평등하게 신과 직결된다는 견해를 내세웠지만,그러나 대체로는 유럽은 1차대전에 이르기까지는 인간사회의 계속적인 발전과 현대의 우위를 믿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옛날에도 그러했듯이 해방 이후에도 우리는 정부의 홍보활동이나 학교교육에서는 다르겠지만 일반 국민으로서는 자기 사회를 자랑스럽게 칭송하는 전통을 갖지 못하였다. 정치·경제가 계속적으로 워낙 혼란과 수렁에서 헤맸기 때문일 것이고,또 근년에는 사회·윤리면에서까지 전례 드문 타락상이 전개되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일종의 절망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족과 사회의 변천을 총체적으로 본다면,세상은 여러 면에서 좋아지고 있는 점도 확실히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차가 늘고 도로가 좋아지고 전화가 보급되고 지방이 발전하고 또 각종의 상품들이 훌륭해지고 물질생활이 풍부해진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이제는 국민 대다수의 권리가 신장되고 억압이 줄고 자유의 폭이 넓어지고 사회복지가 그나마도 확대되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강한 비판 위한 낙관론
우리 자신의 과거와 견주어 볼 적에도 그렇고,또 웬만한 외국들과 비교해 보아서도 이것은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소리는 억압받고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실로 분통터지는 소리요,특정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리로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은 결코 현재를 만족스럽게 본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절망과 자포자기에 부당하게 빠져 들어가지 않고서 현대사회의 결정들을 적극적으로 비판·시정케 하기 위해서는 좋아지는 점들도 함께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한림대 교수·역사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