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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은화의 생활건축

국제공모도 뒤엎는 ‘건축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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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은화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은화 부동산팀 기자

한은화 부동산팀 기자

청주시청사 본관이 난데없는 왜색 시비에 휩싸였다. 1965년 지어진 4층 규모의 본관동은 고 강명구(1917~2000) 건축가가 설계했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만들어 권위를 상징하는 입·평면에서 벗어났고, 전통건축의 처마를 콘크리트 구조로 재해석해 자연채광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건물이다. 문화재청은 2017년 이 건물의 문화재 등록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7월 취임한 이범석 청주시장(국민의힘)의 해석은 달랐다. 이 시장은 지난달 초 시정 질문 답변에서 “일본에서 공부한 설계자가 일본의 근대 건축가의 영향을 받아 일본식 건축양식을 모방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며 왜색 시비에 불을 붙였다. 강 건축가가 일본 와세다대에서 공부한 이력을 문제 삼으며 건물의 옥탑이 후지산을, 로비 천장이 연꽃무늬가 아니라 욱일기를 닮은 듯 보인다고도 했다. 지역 건축사회가 만든 가치평가 보고서가 이를 뒷받침한다. “일본에서 유학한 설계자가 후지산과 욱일기를 직접 형태구성의 모티브로 차용하지 않았더라도 일본건축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일본의 건축법을 그대로 베껴 만든 한국의 건축법으로 지은 건축물도 일본식이라는 추측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청주시청사 당선작. 가운데 본관을 보존했다. [사진 청주시]

청주시청사 당선작. 가운데 본관을 보존했다. [사진 청주시]

무리하게 왜색 시비를 거는 이유는 분명하다. 본관동을 철거하고 신청사를 짓고 싶어서다. 그런데 더 큰 걸림돌이 있다. 2020년 본관동을 품은 신청사를 짓기 위해 국제설계공모전을 열어 당선작을 뽑았다. 공사 도면인 실시설계까지 나왔고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시공사 선정을 위한 입찰만 남겨놓고 있는 상태다. 당선작은 노르웨이 건축회사 스노헤타의 작품이다. 당시 국제설계공모전은 1·2차에 거쳐 장장 6개월 동안 열렸고, 세계적인 수준의 공공청사를 짓겠다며 참가를 독려해 전 세계 52개 팀이 참가했다.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도 9명 중 3명을 해외 건축가로 구성했다. 설계비를 포함해 설계공모전을 여는데 약 100억원을 썼다. 그런 안을 4년 임기의 시장이 당선되자마자 폐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청주시는 당선작이 비효율적이고, 공사비가 많이 든다고 탓한다. 당선작은 본관동을 가운데 보존하고 ‘ㄷ’자 형태로 새로운 건물이 감싸는 형태다. 독창적인 형태가 눈길을 확 끈다. 비워진 가운데 공간은 시민을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청주시는 본관동을 철거하고, 설계공모전을 또 열어 공모비를 포함해 210억원의 설계비를 들여 새 안을 뽑겠다는 방침이다. 설계비는 이전보다 두배 가량 더 비싼데, 공사비는 기존(2300억원)보다 400억원 싼 안을 뽑겠다는 것이다. 지자체와 전문가가 논의해 국제사회가 지켜보는 가운데 뽑힌 안이 이렇게 쉽게 폐기된다. 이런 후진적인 행정 시스템이 결국 후진 공공건축물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