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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화 폭락이 부를 아시아 외환위기 폭탄 언제든 터질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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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호 19면

박상준 와세다대 교수

박상준 와세다대 교수는 26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정부 실개입으로도 엔화 가치 폭락을 막지 못하는 때가 오면 일본도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준희 기자

박상준 와세다대 교수는 26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정부 실개입으로도 엔화 가치 폭락을 막지 못하는 때가 오면 일본도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준희 기자

엔화 폭락의 시대. 지난 20일 달러당 엔화 가치는 32년 만에 150엔이 무너졌다(엔·달러 환율 상승). 1990년 버블붕괴 이후 처음이다.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엔화의 경우 ‘달러당 150엔’ 같은 심리적 저항선이 뚫리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수준이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장 상황의 심각성은 일본 정부의 움직임에서도 알 수 있다. NHK는 21일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으로 투입한 자금만 5조엔(48조3000억원)에 달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말부터 외환시장에 세 차례 실개입했다. 엔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달러를 내다팔아 엔화를 사들인 것이다. 투입한 자금은 총 9조3000억엔(약 90조원)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한·일경제 전문가인 박상준 와세다대 국제학술원(경제학) 교수는 “일본 정부는 달러당 150엔 선을 지키기 위해 계속 ‘복면 개입’(비공식적인 시장 개입)을 할 것”이라며 “엔화 가치 폭락으로 아시아 외환위기가 올 확률은 ‘북한이 핵을 쏠 만큼의 확률’이지만 그 확률은 최근 들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고 언제든 터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리먼 브러더스 사태)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일본경제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경험했다. 엔·달러 환율이 150엔 선이 무너진 이때 엔화 가치 하락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26일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그를 만났다.

일 부채비율 259%로  OECD  1위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아시아 전체로 위기가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2008년 이후 가장 위험해 보인다. 지금은 일본 정부의 개입으로 150엔 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시장 개입으로도 더 이상 엔화 가치 하락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위험할 수 있다. 가령 엔화 약세로 자본이 대거 유출하고 국채가 안 팔리게 되면 일본 정부 입장에선 갚을 돈이 없으니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에 빠지게 되고, 이게 한국·중국 등 이웃 나라로까지 영향을 미치는 식이다.”
일본 정부가 계속 개입할까.
“그렇게 본다. 일본 정부는 엔화 가치가 150엔 이하로 떨어지는 건 위험하다고 보기 때문에 150엔 선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구두개입을 하거나, 직접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매각하고 엔화를 매입하는 식으로 실개입할 것이다. 실개입의 형태는 지금처럼 (복면 개입) 할 것 같다. 사실 현재 상황에서는 구두·실개입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실개입도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일본 정부의 주장처럼 외환시장에 단지 투기꾼만 있다면 방어가 되겠지만, 지금은 과거 엔화 가치가 내릴 때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일본의 무역 거래 결제에서 50% 이상은 달러로 이뤄지고 있는데, 일본은 무역적자가 심하다. 들어오는 달러보다 나가는 달러가 더 많다는 얘기다. 기업들이 공장을 해외에 두고 있다보니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로 들어오지 않는다. 달러가 더 비싸질 것에 대비해 기업들이 달러를 더 사 모으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달러를 사서 해외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이른바 ‘와타나베 부인’들의 움직임도 시작됐다(엔 캐리 트레이드). 엔화 가치가 내리면서 엔 캐리가 유행했던 2005~2007년보다는 거래 규모가 작지만 일단 시작은 됐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개입해 엔화 가치를 올리면 그때 달러를 대거 사들이고 이로 인해 다시 엔화 가치가 떨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미·일 금리 차다. 금리를 올릴 수는 없나.
“미국이 계속 금리를 올려 미·일 금리 차가 확대되면 일본 사람이나 해외 투자자 입장에선 일본에 돈을 놔둘 이유가 없다. 이게 엔화를 계속 약세로 만드는 요인이다. 이 상황을 막으려면 일본 정부는 금리를 올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자니 국채 상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렇다고 엔화 가치 하락을 이대로 놔두자니 자본 유출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지금으로서는 시장 개입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다.”

박 교수는 그러면서 “일본 통화정책이 ‘진퇴양난’의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국채 규모가 너무 커져서 금리를 함부로 올리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제로금리를 고수하자니 엔화 가치가 계속 떨어지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 기준 일본 국채 잔액은 약 1225조엔(약 1경1908조원)에 달한다. 박 교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 정부부채 비율도 지난해 기준으로 25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에서 가장 높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행은 지난 27~28일 진행한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초저금리 정책을 지속하기로 입장을 고수했다. 단기금리는 -0.1%로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금리는 0% 정도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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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개입으로도 엔화 가치 하락을 막지 못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엔화 가치가 어디까지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금리를 올리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 일본이 갚아야 할 기존 국채도 있지만, 신규로 발행하는 국채가 문제다. 신규 발행 국채는 금리가 오른 만큼 이자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갚아야 하는 기존 국채 규모보다 신규 발행 국채 규모가 더 크다는 것도 문제다. 만기가 도래하는 국채와 재정 적자분 만큼 신규 국채를 발행해야 하기 때문인데, 코로나19 이후 신규 발행 국채 규모는 계속 늘어 올해는 39조엔 수준이다. 가계·기업의 부채도 무시 못 한다. 부동산 대출도 꽤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금리를 올리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리를 올려야 하는 시점은 언제일까.
“엔화 가치 하락으로 일본 국채 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할 때가 될 것이다. 이 방어선이 깨지면 정말 위험해진다. 일본 국채는 아시아 위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일본 국채 기피현상은 ‘지진’이나 ‘핵미사일’급 파괴력을 가질 것이다. 지진이나 핵은 터질 확률은 낮지만 한 번 터지면 폭발력이 엄청나다.”

일 국채 기피는 ‘핵 미사일급’ 위력

그런 상황이 올까.
“해외 투자자들의 일본 국채 매입 비중은 10% 정도다. 국채를 팔려는 사람이 늘면 국채 가격은 내려가고, 금리(채권 수익률)는 올라간다. 채권 금리가 오르면 일본 정부가 기준금리를 아무리 낮춘다고 해도 다른 금리까지 끌어 올리게 된다. 일본경제엔 타격이 생긴다. 신규 발행 국채 이자도 같이 오르니 일본 재정까지 압박이 가해지고, 결국엔 국채를 갚지 못하는 채무 불이행 사태가 될 수 있다.”
지금도 위험하다는 시각이 있다.
“지금은 150엔 선에서 두 세력이 팽팽하게 공방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나의 세력은 달러를 사들이는 엔 캐리 세력으로 미·일 금리 차가 커질수록 엔화 약세가 심화될 거란 심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세력은 엔화가 싸니까 일본 자산에 투자하려는 해외 투자자다. 일본 경제는 아직 매력적인 투자 요인이 있고, 일본에 들어오지 않은 해외 소득이 많으니 엔화 강세 요인이 존재한다는 심리다. 엔 케리 세력과 해외 투자자들이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한국은 1997년, 2009년 두 세력 간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원화 가치가 확 무너졌는데, 일본은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엔 캐리 세력으로 힘이 쏠리면, 외환·금융위기 정도의 충격이 오는 건가.
“일본이 디폴트 상태가 되면 도미노처럼 아시아 전체, 신흥국 전체로 파장이 번져나갈 것이다. 디폴트까지 가지 않는다 해도, 엔화 가치가 지금보다 더 추락한다면 한국·중국 등 아시아권에서 달러 유출이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2016년 미국이 양적완화 출구정책(기준금리 인상)을 할 수 있다는 소문만으로 인도네시아·브라질 주식시장이 폭락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국채 가격이 하락하면 한국 국채 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해외 투자자들이 일본 국채를 던지는 상황이라면, 한국 국채는 안전자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과 일본, 중국은 특히 무역구조도 비슷해 통화 가치에 서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만큼 충격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외환·금융위기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고, 한국이나 일본 기업의 기초체력(펀더멘털)도 1997년이나 2009년보다 강하다. 일시적인 충격은 오겠지만 기업 실적이 살아 있기 때문에 외환·금융위기 때만큼 혼란이 오래 가지는 않을 거란 얘기다.”
지금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나.
“정부-기업-은행 간 외환 수급 정도와 달러 수요를 면밀히 점검하고 모니터링해야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1년 미국 오바마 정부가 원유 사재기를 못 하게 한 것이나,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달러 사재기를 못 하도록 경고한 것이 그 예다. 한·중·일 간 역내 달러 사재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책 공조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미 또는 한·중, 한·일 통화스와프를 해 놓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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