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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심상치 않은 레고랜드발 자금 경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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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추경호(가운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3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경호(가운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3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한은, 50조원 이상 유동성 공급 결정

기업 자금난, 시스템 리스크로 확산 막아야

정부와 한국은행이 자금시장 안정을 위해 긴급 대응에 나섰다. 추경호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은 총재, 김주현 금융위원장 등은 어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선 기업 자금난을 덜기 위해 회사채 시장에 50조원 이상의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채권시장안정펀드와 기업은행·산업은행·신용보증기금 등 정책금융기관을 총동원한다.

한은은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은행들의 대출 여력을 키워주기 위한 긴급 조치를 논의하기로 했다. 은행들이 한은에서 돈을 빌릴 때 담보로 맡기는 유가증권(대출 적격담보증권)에 은행채 등을 포함하는 방안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했던 2020년 3월에도 한은은 1년간 한시적으로 이런 조치를 한 적이 있다.

최근 회사채·기업어음(CP) 시장에선 신용등급이 비교적 양호한 대기업까지 자금 조달에 비상이 걸렸다. 한 대기업은 회사채 1500억원어치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수요예측에서 대규모 미달이 발생했다. 다른 대기업은 시장에서 조달이 여의치 않자 계열사에서 3개월짜리 단기 자금 5000억원을 빌렸다.

가뜩이나 불안했던 자금시장에 직격탄을 날린 건 강원도의 레고랜드 부도 사태다. 강원도가 지급을 보증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2050억원어치는 결국 부도 처리됐다.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채권마저 안전하지 않다는 소식에 투자심리가 빠르게 얼어붙었다. 특히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부실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견·중소기업의 자금 사정은 대기업보다 훨씬 심각하다. 연 10% 이상 고금리를 제시해도 투자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비우량 회사채(BBB-등급, 3년 만기) 금리는 지난 21일 연 11.59%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2010년 1월 이후 12년9개월 만에 최고치다.

한국과 미국의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을 이어가는 것도 기업들의 자금 조달 여건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다음 달 초 회의에서 추가 금리 인상을 예고했다. 한은으로선 외국인 자금 유출을 제한하고 원화값 하락(환율 상승)을 방어하기 위해 추가 금리 인상이 불가피하다.

정부와 한은이 공동으로 시장 달래기에 나섰지만 단숨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번 레고랜드발 자금 경색은 위기의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더 어려운 상황이 닥칠 가능성도 있다. 물론 투자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투자자 본인이 져야 한다. 도덕적 해이가 있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정부와 한은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금 경색이 금융위기 같은 시스템 리스크로 확대되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만에 하나 건실한 기업까지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으로 흑자 부도를 내는 일은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