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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1400원 진입 초읽기 ‘원저 쇼크’ 1997년, 2008년 어땠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 이날 거래를 마친 원ㆍ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 이날 거래를 마친 원ㆍ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달러당 원화가치 1400원대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1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 값은 장 중 1395.5원을 찍었다. 전일 종가 대비 하락 폭이 20원을 뛰어넘었다. 위기 때나 나타나던 양상이다. 이후 1390.9원으로 마감하긴 했지만 1400원 선 돌파는 시간 문제란 공포가 시장에 팽배하다.

1990년 3월 한국 정부가 환율 변동제를 도입한 이후 원화가치가 1400원 밑으로 내려간(환율은 상승) 기간은 1997년 12월~1998년 6월과 2008년 11월~2009년 3월 단 두 차례다. 두 번 모두 한국 경제에 혹독한 시기였다. 1997년은 외환위기 그리고 2008년은 금융위기였다.

1997년과 2008년 ‘무슨 일이’

원화가치가 1400원 선 밑에 머물었던 과거 두 번의 시기엔 위기란 호칭에 걸맞게 많은 일이 있었다. IMF 구제금융 신청 직후인 1997년 12월 무디스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정크 본드(신용등급이 매우 낮아 ‘쓰레기’ 취급을 받는 채권) 수준으로 하향 조정했다. 한국은행 환매조건부채권(RP) 금리는 연 20%대로 치솟았다. 꽉 막힌 자금줄로 해태ㆍ뉴코아ㆍ고려증권 등 기업의 대량 부도가 이어졌다. IMF가 내건 조건에 따라 5개 은행, 55개 기업 퇴출 등 유례없는 대규모 구조조정도 정부 주도로 단행됐다. 외환 거래 자유화 등 대대적 자본시장 개편 작업도 함께 이뤄졌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2008년 위기는 미국이 진앙이었다. 대형 금융사인 베어스턴스, 리먼 브러더스, 메릴린치가 차례로 무너졌다. 미국 1위 가전유통업체인 서킷시티가 파산했고,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회사인 제너럴모터스(GM)가 정부 구제금융으로 간신히 해체 위기를 모면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면서 원화 값은 1400원 아래로 추락했다.

불과 10년 전 IMF 외환위기의 악몽이 생생했던 2008년 한국은 비상이었다. IMF 때 했던 은행 대외채무 지급 보증, 금융권 외화자금 직접 공급 등 정부 대책이 이어졌다. 40조원 한도의 구조조정기금도 조성됐다. 당시 한ㆍ미 통화스와프도 처음 체결됐는데 환율 충격을 잠시나마 진정시키는 ‘한 방’ 역할을 했다.

위기냐 정상이냐의 경계선은 사실 흐릿하다. 초반을 한참 지나 정점에 올라서야 정부도 기업도 위기를 자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7년과 2008년 한국도 그랬다. 하지만 그때도 환율이 1400원대로 진입한 건  IMF 구제금융 신청(1997년 11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2008년 9월) 같은 ‘특정한 충격’이 있고 난 후였다.

1997년 12월 3일 당시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와 임창열 부총리(가운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구제금융 협상을 타결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중앙DB

1997년 12월 3일 당시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와 임창열 부총리(가운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구제금융 협상을 타결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중앙DB

13년 만에 원화 값 1400원대 눈 앞

시장을 단번에 뒤집을 만한 충격적 사건 없이 원화가치가 스물스물 1400원 목전까지 주저앉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 하고 긴급 대책을 쏟아내던 과거 정부와 비교하면 현 정부 움직임은 무대응에 가깝다. ‘킹 달러’로 대표되는 외부 요인 크고 한국 경제 전반의 건전성 지표가 상대적으로 낫다는 점을 정부는 반복적으로 내세울 뿐이다.

이날 방기선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비상경제 태스크포스(TF) 회의에서 “주요국의 금리 인상 폭과 속도에 대한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는 점이 국내ㆍ외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진단한다”며 “각별한 경계감을 가지고 금융ㆍ외환 시장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시장 안정을 위해 가용한 대응 조치를 철저히 점검해 줄 것”을 지시했다. 경계, 예의 주시, 조치 점검 등 원화 값이 1200원, 1300원을 돌파할 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단어 선택이었다.

전문가는 현 상황을 심각하게 본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큰 사건 없이 온전히 한ㆍ미 금리 역전, 8월 한국 경상수지 적자 전환 가능성 때문에 환율이 1400원대 가까이로 가고 있다”며 “미국 금리 인상 중단, 국제유가의 대폭 하락, 중국 경기 회복 등 뚜렷한 변화가 있어야 해결 가능한 문제인데 그럴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양 교수는 “정부가 별다른 대응책 없이 사실상 똑같은 내용의 ‘한국 경제가 건전하다’는 식의 발언만 계속하고 있는데, 외환시장을 진정시키는데 한계가 있다”라고 짚었다.

지난 5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뉴스1

지난 5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뉴스1

한ㆍ미 금리 역전과 지금의 ‘원저 쇼크’가 장기화한다면 한국 경제는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낮은 원화가치가 수출 경쟁력 확대로 연결되는 효과도 더는 기대할 수 없어 불안감은 더 높다. 꾸준히 내려가는 원화 값에 한국 경제가 ‘끓어가는 냄비 속 개구리’ 처지가 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 원화가 다른 통화에 비해 더 두러지게 약세를 보이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이 75bp(1bp=0.01%)씩 금리를 올리는 상황에서 한국은 25bp씩 지속적으로 금리를 인상하겠다고 공언한 게 결정적 패착으로 보인다”며 “한ㆍ미 금리 차이가 계속 나는 데도 금리를 대폭 올리지 못할 만큼 한국 경제 내부 상황이 불안하다는 인식을 해외 투자자에게 심어준 격이 됐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이어 “외환위기나 금융위기와 달리 결정적 사건 없이 환율이 1400원대에 진입하게 됐는데 그런 의미에서 현 상황이 심각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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