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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주차장 침수…높이 50㎝ 차수판에 생사 갈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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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해 완공돼 입주한 서울 서초구 디에이치라클라스 아파트는 지난달 8일 서울을 강타한 기습폭우 때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당시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빼려던 40대 남성이 밀려든 빗물을 피하지 못해 숨진 건물이나 차량 침수 피해가 발생한 반포자이 아파트와는 직선거리로 1㎞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지대가 높지 않은데도 차량 침수 피해가 한 건도 없었다”며 “차수판이 물길을 막아 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 출입구 양쪽에는 수동식 차수판(건축물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판)을 끼워넣을 수 있는 틀이 부착돼 있다. 폭우가 쏟아지면 높이 50㎝가 넘는 스테인리스 차수판을 간단히 끼워넣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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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전국을 할퀸 수마의 피해는 주로 지하에 집중됐다. 지난달 8일에는 서울 관악구의 반지하 주택과 서초구의 한 빌딩 지하주차장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한 달도 안 돼 한반도를 덮친 태풍 ‘힌남노’는 경북 포항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주민들이 사망하는 비극을 낳았다.

7명이 목숨을 잃은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물이 가득 들어차는 데 걸린 시간은 단 8분이었다. 같은 날 포항 다른 아파트에서 지하주차장에 있던 차량을 보러 나갔던 주민 김모(50대)씨는 “물이 어느 순간 무릎 넘어까지 차올랐다. 뉴스를 보다가 ‘나도 죽을 뻔했구나’란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고 말했다. 일단 지하주차장에 물이 차올라 차가 잠기면 수압 때문에 차 문을 여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도 한 70대 남성이 SUV 승용차 안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폭우 등에 침수된 지하주차장에서 인명 사고가 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6년 태풍 ‘차바’ 때는 울산에서 사망자가 나왔다. 폭우나 태풍이 거듭될 때마다 지하의 비극은 반복되지만, 침수 방지시설 설치에 대한 명확한 법규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

2011년 우면산 산사태로 큰 피해를 겪은 서울 서초구는 자체 지침으로 건물 신축 시 차수판 설치를 의무화했다. 광진구도 이듬해 같은 규정을 도입했다. 그러나 벌칙 규정이 없는 권고 수준이어서 설치 여부에 대한 집계조차 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서초구 관계자는 “건축 허가와 관련한 규정이 많아 차수판 설치 조건만을 따로 집계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광진구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지하주차장 등 지하시설 침수를 막기 위해서는 차수판 높이 규정을 정하고, 건축 허가 때 설치 조건을 내거는 등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며 “(가이드라인은) 기존 건축물에도 소급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배수펌프 등의 침수 방지설비를 갖추는 게 중요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건축물에 이런 설비를 증설·확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비용이 문제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비용 문제가 있기 때문에 건축주에게 (침수 방지설비) 설치를 강제하기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 자동식 차수판을 설치하려면 기본 9000만원 이상이 든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비용을 지원해 주면서 건축주들에게 설치를 유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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