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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T, 러시아 반대에 '北CVID' 선언문 불발…국제 핵공조 난항

중앙일보

입력

7년만에 열린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러시아의 반발 등에 막혀 선언문을 채택하지 못하고 폐막했다. 채택하려던 선언문엔 북한의 핵 도발을 규탄하고 비핵화를 촉구하는 대목이 다수 포함돼 있었는데, 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단합된 대응이 갈수록 어려워질 거란 우려가 나온다.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개막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 사진은 미콜라 토치츠키 우크라이나 외무부 차관이 연설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개막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 사진은 미콜라 토치츠키 우크라이나 외무부 차관이 연설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CVID, 핵실험 규탄 등 담았는데…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채택이 불발된 이번 NPT 평가회의의 36쪽짜리 선언문 초안에는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에 대한 지지 ▲국제 비확산 체제를 위협하는 북핵에 대한 우려 ▲유엔 대북 제재의 충실한 이행 ▲6차례 북한의 핵실험 규탄과 향후 추가 핵실험에 대한 경고 등이 담겼다.

NPT 평가회의는 NPT 회원국이 모여 조약 이행상황을 점검하는 5년 주기 회의다. 이번 회의는 2020년 예정됐지만, 코로나의 여파로 연기돼 7년만에 개최됐다.

정부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함상욱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은 회의 첫날인 1일(현지시간) 연설부터 "북한은 NPT 체제를 악용해 대놓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유일한 나라로, NPT의 북핵 대응은 NPT 체제 생존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라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공조를 호소했다. 이어 프랑스 외교부와 공동으로 각국 대표단 70여명이 참석한 북핵 관련 고위급 토론회를 여는 등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총력 외교전을 폈다.

북한은 1985년 NPT에 가입했다가 2003년 일방적 탈퇴를 선언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지금까지 NPT에 들어왔다가 일방적으로 탈퇴를 선언한 국가는 북한이 유일한데, NPT는 북한의 탈퇴를 공식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명패를 의장이 보관하고 있다"며 "북한은 NPT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려 하겠지만 정부로선 북한이 NPT로 조속히 복귀하고 국제 의무를 준수하도록 계속 촉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1일(현지시간) 시작된 NPT 평가회의에서 연설하는 함상욱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 외교부.

지난 1일(현지시간) 시작된 NPT 평가회의에서 연설하는 함상욱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 외교부.

러ㆍ중 vs 서방 대립

그러나 4주 동안 진행된 이번 NPT 평가회의에서 최종 선언문 채택은 결국 무산됐다.

만장일치제로 운영되는 평가회의의 결과문이 채택되려면 191개 회원국 모두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 회의 내내 우크라이나 사태를 비롯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식 핵 공유, 이란 핵합의(JCPOA), 미국ㆍ영국ㆍ호주의 핵추진 잠수함 협력체인 오커스(AUKUS) 등 현안을 두고 중국ㆍ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사사건건 부딪혔다.

특히 러시아의 반발이 결정적이었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자포리자 원전관련 문구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선언문 최종안에 "자포리자 원전에 대한 군사 행위에 중대한 우려를 표명한다"며 사실상 자국을 겨냥한 문구를 문제삼으며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자 미국은 "합의에 못 이른 건 러시아 때문"(애덤 셰인먼 비확산 특별대표, 지난 26일)이라며 선언문 채택 불발의 책임을 러시아에 돌렸다. 러시아 외에 이란도 "최종 선언문에는 서방이 군림하는 현 NPT 체제를 개선할만한 어떤 희망도 담기지 않았다"며 회의적 입장을 밝혔다.

외교 소식통은 "원론적 문구를 놓고도 회원국 간 이견이 심해 결과문 채택이 어차피 어려울 거란 회의론이 초반부터 있었다"며 "2015년 회의 때도 중동비핵지대를 놓고 갈등을 빚다 결과문 채택이 결국 무산됐지만, 회의 때마다 만들어진 결과문 자체는 회원국 의견을 반영한 문서로 남기 때문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NPT평가회의에서 발언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NPT평가회의에서 발언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핵 위협 갈수록 높아지는데…

7년만에 열린 이번 NPT 회의에서도 선언문 채택이 좌절되자 국제사회의 단합된 핵 문제 관련 공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26일(현지시간) "이번 NPT 회의는 기존 NPT를 강화하고 갈수록 심각해지는 핵무기 군비 증강 문제를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한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짤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번 회의를 통해 미국의 '핵 우산' 공약을 재확인하는 의미는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을 비롯해 콜린 칼 미 국방부 정책차관, 보니 젠킨스 미 국무부 군축ㆍ국제안보 담당 차관 등 미 고위 당국자들은 "미국은 동맹, 파트너의 중대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극단적 상황에서만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겠다"는 원칙을 이번 회의에서 연이어 강조했다. 북한이 최근 한국을 겨냥한 핵무기 사용과 선제타격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의 핵 정책이 '동맹의 이익 침탈' 상황에서도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열어둔 것이라 주목된다는 분석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그간 북핵을 제어하던 국제 질서의 중요한 두 축인 '유엔 안보리'와 'NPT 체제'가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인해 상당히 훼손된 상황"이라며 "NPT가 앞으로도 공통된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경우 북한이 현 정세를 악용해 사실상의 핵 보유국으로 등극하고 1968년부터 지속됐던 NPT 체제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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