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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심 거듭하는 장 내외 세력과 인맥|새 정치 질서 꿈꾸는 「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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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내각제 개헌을 앞세워 벌이고 있는 민자당의 내분과 당권싸움은 재야운동권 정치세력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진로 모색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재야 운동권은 어느 정파·단체·세력이든 간에 새로운 정치질서를 도모하고 그 방법도 합법·반합법·비합법수단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공개 조직이 있는가 하면 비공개 조직이거나 2중적 조직형태를 띠기도 한다. 재야는 신 정치질서의 재편시기를 14대 총선 및 대통령선거까지로 보고 있다. 현재 발언권을 가진 재야범주에 포괄될 수 있는 세력은 크게 「정치집단」과 「순수재야」로 분류된다.
정치집단에는 평민당 서명파, 민주당 통합파, 통추회의속의 민주 연합파, 민중당(가칭)창당세력 등 4개 집단이 있다.
순수재야는 현재 거의 대부분이 지난 5월21일 창립된 「민자당 일당 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쟁취를 위한 국민연합」(약칭 국민연합)에 참가하고 있다.
국민연합은 전노협·전교조·전대협·전농·전민련·전노운협·전빈련 등 13개 부문 운동 및 활동가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중당도 참관단체로 되어있다.
이들 중 전노협은 가입노조원 20만 명과 평균 동원능력 1만 명을, 전교조는 공식·비공식 조합원 3만 명 중 동원 가능인원이 2천 명, 이중 서울지역에서만 활동력이 왕성한 「가두교사」가 8백 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운동조직이다. 전대협은 최대동원 인원이 2만 명 정도로 관측되며 년4월에 창립된 전농은 90여개 군 농민회와 가톨릭 농민회·기독교 농민화를 망라한 최대 농민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건국이래 최대 사회운동 조직으로 주목받으면서 지난해 1월 탄생된 전민련은 계속되는 지도부의 구속과 다른 부문 운동단체의 탄생으로 상당한 세약화를 보이고 있으나 국민연합 중 정치적 지도력이 가장 뛰어난 단체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 공개적인 합법·반합법 단체외에도 인민 노련·삼민·사노맹·혁노맹 같은 비합법조직으로 당국의 수사를 받은 그룹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혁명적 전위 정당지향의 지하운동 그룹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이를 재야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정치질서를 바라보고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재야는 역시 4개 그룹의 정치집단.

<「의회 내 재야」분류>
특히 이해찬·이상수 의원 등 평민당 서명파와 노무현·이철·김정길 의원 등 민주당 통합파, 통추 회의의 이부영·제정구·여익구·김도연씨 등 민주 연합파는 지난 4개월간 야권통합운동과정에서 장기적인 목표와 「정서의 동질성」을 서로 확인했다고 한다.
이해찬·노무현 의원 등이 기성 정치인이며 재야분류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으나 ▲13대 국회에서 재야운동권이 대거 의회로 진입한 이후 재야와 정치권의 구분이 모호해졌고 ▲이들의 정치 행태가 「재야식」이라는 점 ▲재야권과 실질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의회내 재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13대 초기부터 노·이 의원 및 이상수 의원은 노동위원회에 소속돼 노동문제에 강한 애착을 보여 「노동위 3총사라」는 별명을 가진 이래 지난해말 이들은 김영삼 총재(당시)의 민주당과 평민당에서 각각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양당통합 운동을 시작한 인연」으로 끈끈하게 맺어졌다.
노·이 의원은 또 이철·김정길 의원과 함께 지난 7월 국회날치기 사태에 의원직 사퇴로대응, 오늘에 까지 이른 기나긴 사퇴정국의 「공모자」이기도 하다.
노 의원은 『우리의 공통된 인식이 있다면 보스 중심의 봉건적 당내 질서, 이로 인해 빚어지는 화석같이 경직된 정치문화를 혁파해야겠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합당으로 더욱 강화된 지배권력의 정권교체를 다음선거에서 이룩해야 한다』는 통합 서명파의 기본입장을 정리했다.
이들은 통추회의와 함께 평민-민주 양당의 대통합 운동을 전개했으나 10월26일 사실상의 통추 해체로 양당의 당권파간 통합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김대중 평민당 총재 중심의 어떠한 야권 통합안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실패한 대통합의 세 주체그룹은 모두 부인하고 있으나 정치적 목표, 온건한 진보성향, 그간의 동일한 정치행보 등으로 미루어 신 야당이 「삼란성 쌍둥이」로 태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야권 소통합의 전망이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정국은 거여와 보수 평민당, 진보 신야당의 3각 구도로 정립되는 양상이 되는데 세는 약하지만 신야당 구성원의 「국민적 인기도」(노 의원은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9월20일자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다)에 비춰 1노 3김 정치구도를 무서운 속도로 갉아먹을 수 있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당분간 이들은 자기 당·국민운동 단체에 그대로 있으면서 나름대로의 등원거부·대통합 요구를 꾸준히 전개하겠다고 한다.
11월10일 창당대회를 목표로 뛰고 있는 민중당은 재야 전체를 통틀어 보혁구도를 명백히 하고 정치판에 뛰어든 유일한 합법적 혁신정치 운동세력이다.

<「내각제 선호」주목>
민자당 합당 시 정국 구상인 보혁구도에 대해 평민당을 비롯한 민주당·전민련 등 대부분의 야권·재야 세력이 이를 「민주-반 민주구도」호도책으로 규정, 반독재 투쟁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반면 민중당 준비세력은 「민중권력」쟁취의 정치환경으로는 보수-진보구도를 보장하는 의원내각 제목이 낫다는 판단을 했던 점이 주목된다.
이우재·장기표·이재오·정태윤씨 등이 주축이 된 민중당은 출발부터 야권 통합이나, 지배권력을 평민당 등 반독재 연합 세력과 함께 포위·고립시켜 「민주연합정부」를 구성한 뒤 「자주·민주·통일 정부 수립」의 발판을 삼아야 한다는 「전략적 통일전선론」을 명백히 반대했다.
장씨는 ▲정치 운동 조직으로서 합법적 진보정당과 ▲대중운동 조직으로서 사회운동세력의 국민연합, 양쪽이 상호 강화되면서 「민중주체의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이른바 「양날개론」으로 자신들의 권력 접근 경로를 밝혔다.
노동자 계급 중심의 이념 정당을 지향하되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다소 장황하게 자신의 강령을 정립한 민중당이 정치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가질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기존 정치판에 극도의 혐오를 느끼는 정치 냉담층 「민중 세력」을 재야 정치집단의 공략대상으로 본다면 재야권 내부에서 통합 3주체 중심의 민주연합 그룹과 이들 민중당세력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소위 순수 재야로 표현되는 사회운동 세력 중 전민련은 정당운동에 관여하지는 않으면서 「정치적 입장」을 평민당·민주 연합파·재야원로 등으로 꾸준히 공급함으로써 자신의 자주·민주·통일 이념을 신 정치 질서 속에 관철하려 하고 있다.
전민련의 민주연합 정부 구성을 위한 전략적 통일 전선론은 결과적으로 ▲평민당과의 제휴 ▲현실적 정권교체 대안으로 김대중씨를 인정하는 측면을 갖고 있어 87년 대통령 선거의 「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의 경향을 띠고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그러나 전민련을 비판하는 한 재야인사가 『김대중 총재의 영향력이 많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이라도 김 총재가 강력히 손짓하면 같이 연대할 비판적 지지론자는 전체 재야의 반은 될 것』이라고 털어놓을 정도고 보면 전민련의 민족민주 정부수립을 위한 지렛대로서 김 총재 인정이라는 전략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물론 전민련에서 세대교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정치지향의 재야는 크게 ▲원칙적으로 평민당을 포함시키는 민주연합 추구파(통합 3주체·전민련) ▲독자적인 민중 정당 추구파(민중당)의 둘로 갈라지며 평민당 포함그룹에서도 친 김라인(전민련)과 반 김라인(통합운동 3주체)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룹들의 리더십이 모두 전민련 출신이며 재야운동의 원로세대를 극복하고 등장한 40대의 조직 운동가라는 점도 관심 가는 부분이다.
김근태씨는 전민련 정책기획실장이었고 현재 옥중에 있지만 여전히 전민련의 이념적 지도자다. 그는 85년 정치암흑 시대에 민청련 의장으로 재야의 뉴 리더로 등장한 뒤 치안본부 고문사건의 폭로자로서 성가를 높였다.
이부영씨는 동아 투위 기자 출신으로 전민련 초대 상임 의장직을 맡으면서 대중적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쌓았고 지난 3월 전민련 대의원대회에서 「정치 세력화 안」이 부결되자 탈퇴, 4월에 민련추를 구성했다.
장기표씨는 학생시절이던 70년 전태일 분신사건 수습에 앞장선 이래 「투쟁 현장에 장씨 있다」는 숱한 일화를 남기며 헌신적 운동가로 신망을 받아온 전민련 사무처장 출신.
그도 역시 「즉각적 정치 세력론」으로 「시기 상조론」을 주장했던 김근태씨와 논쟁 끝에 전민련을 탈퇴, 89년 11월 이우재씨, 한겨레 당 출신 제정구, 민중의당 출신 정태윤씨와 함께 진보정당 준비모임을 만든 뒤 다시 민련추로의 발전적 해체를 통해 이부영씨와 만났다.

<6·29후 커진 공간>
결국 독자정당을 추진할 것인가, 야권통합-민주 연합당을 만들 것인가의 논쟁으로 이부영씨는 제씨와 함께 통추회의 민주 연합파로 참가하게 됐고 장씨는 민련추에 남아 독자적인 민중당 창당으로 조직을 발전시켰다.
재야권에서는 정보기관의 분석이라며 ▲김씨는 조직력이 뛰어나고 신출귀몰하므로 건마다 집어 넣어야하고(감옥에) ▲장씨는 논리적인데다 발이 넓고 정치력이 있어 발을 묶어야하고(계속 감시) ▲이씨는 리버럴하고 원칙 추구의 선비 스타일이니 키우면서 잘라야한다는 농담이 있는데 각각의 특징을 정확히 표현 했다는게 중론이다.
순수재야이면서 부문 운동조직으로 대규모·대중성을 지향하는 전노협·전교조·전농 등은 구체적인 정치적 전망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들 내부에 여러 가지 정치적 성향이 혼재하고 있는 데다 아직은 조직확대·강화작업이 1차 적인 목표로 돼있어 일종의 사회압력단체 성격을 띠고 있다.
대통령 선거 때까지만 해도 재야운동 구심체였던 문익환·백기완·계훈제·박형규·김관석씨 등은 이제 원로명망가 이상으로 대접받지 못하고있다.
재야운동의 중심에서 뛰고있는 한 활동가는 『6·29이후 재야운동이 갑자기 커진 활동공간에서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역량의 극심한 소진과 분산을 경험하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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