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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치솟는 해외 논문값에 우는 한국 대학, 고환율까지 겹쳐 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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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부 컨트롤 타워 부재, 쩔쩔매는 연구자들

가파른 가격 인상에 연 1800억원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25일 오전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충남대를 찾아 윤석열 정부의 ‘반도체 관련 인재양성 방안’과 관련한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박 장관은 "향후 10년간 반도체 관련 인재 15만명을 양성하겠다"고 밝히며 실험실을 돌아보고 시스템반도체 설계 전공 학생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 육성의 함정은 의외의 장소에 도사리고 있다. 해외 논문이다. 웬만한 국ㆍ공립대 연구진조차 반도체와 관련한 핵심 저널을 읽을 수 없다. 한 국립대에서 교수를 했던 반도체 전문가는 "반도체와 관련한 새로운 연구 논문을 대학에서 구독하지 못해 서울대에 있는 교수들에게 다운받아 보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고 말했다.

반도체 최신 논문도 구독 못해

교육·과기·문체부로 정책 분산 

세계 각국이 기술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반도체 분야의 경우 첨단 논문을 접하지 못하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게 관련 업계의 얘기다. 서울대 재료공학부 박민혁 교수는 “반도체 분야 연구자들은 논문에 실험 방법을 실을 때 원칙이, 같은 필드에서 일하는 학자들이 보면 그대로 재현할 만큼 상세하게 알려준다”며 “논문을 읽으면 거기에 나온 방법을 기반으로 쉽게 새로운 연구를 쌓아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박 교수는 “그러나 관련 저널을 못 보면 이미 나온 연구를 알지 못하니 똑같은 연구를 반복하면서 자꾸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요즘도 다른 대학교수들로부터 저널을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했다.

반도체 분야의 경우 '네이처' 저널의 자매지로 출간하는 '네이처 일렉트로닉스'나 '네이처 리뷰스머터리얼즈' 같은 저널에 실린 논문을 보면서 인사이트를 얻는 게 중요한데 지방 국립대에선 이를 못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 등이 해외 학술지 구독에 내는 돈은 18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이 비용은 매년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환율에 ‘억’ 소리 나는 대학=지난 15일 오후 3시쯤 서울대 관정도서관으로 장덕진 도서관장을 찾아갔다. 장 관장은 계속 오르는 해외 학술지 구독 비용에 고민이 크다고 했다. 서울대는 해외 저널 구매비가 계속 늘어 주요 5개 학술지 구독료가 2013년 38억 9000만원에서 내년엔 67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올해는 특히 환율이 치솟으면서 직격탄을 맞게 됐다.

서울대 해외 학술지 구입 비용

서울대 해외 학술지 구입 비용

장 관장은 "환율 헤징을 하는 방안까지 논의했다"며 "당장 올해도 걱정이지만 앞으로도 빠른 속도로 예산이 늘어나야 하면 서울대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문제를 각 대학 차원에만 맡겨놓지 말고 교육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며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정부 주도로 주요 출판사들과 협상해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오픈 액세스(OA) 추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해외 학술지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닌다는 지적은 곳곳에서 제기된다.

장덕진 서울대 도서관장

장덕진 서울대 도서관장

‘세계적 차원의 학문 경쟁 격화의 와중에 해외 학술출판사의 횡포로 인해 정상적인 학문적 소통 체제가 파괴되고 있다. 해외의 거대 학술출판사가 대학도서관의 전자저널 구독료를 매년 가파르게 올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김명환 전 서울대 도서관장이 학술지 문제 해결을 위해 전국자연과학대학장협의회 학장들에게 보낸 내용이다. 한국 대학들의 협상력이 떨어지고 정부에도 컨트롤 타워가 없어 외화가 낭비된다는 지적이다. 매년 구독료 지출은 느는데 가격은 더 많이 올라 서울대까지 구독 출판물 수가 줄고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관계자는 "구독료 인상으로 근래에 몇 개의 해외 학술지 구독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한 국립대의 경우 주요 학술지의 2300여종 저널을 일괄 구독하던 ‘빅 딜’ 방식을 포기하고 개별 저널을 선택적으로 구독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정부 당국도 문제의 심각성을 안다. 교육부는 2020년 한국판 뉴딜 과제로 ‘대학 라이선스 사업’을 선정했다. 지난 1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을 통해 사이언스다이렉트를 도입하며 대학 단위에서 사던 학술 전자자료를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대학과 연합해서 외국 학술지를 좋은 조건으로 구독할 수 있도록 예산 확보에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대학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부처마다 제각각=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지난해 10월 학술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안을 의결하면서 ‘정부의 학술정보 지원 정책이 분산 추진돼 실행력 및 실효성이 미미하다’고 지적했다. 담당 업무가 교육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로 나뉘어 있고 이를 총괄할 콘트롤 타워가 없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해외 출판사와 협상에 나선 담당자들은 막막한 상황을 호소한다.

한 대학 협상 컨소시엄 관계자는 “독점적 지위에 있는 해외 업체들은 마음대로 하겠다는 식인데 우리는 순환보직을 맡은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차출한다”며 “외국 출판사는 전문가와 변호사가 시뮬레이션까지 하면서 전략을 세우는데 우린 대책이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결국 국가 차원에서 나서줘야 하는데, 컨트롤 타워도 없이 교육부 따로, 문체부 따로, 과기부 따로여서 우리끼리는 ‘고아’라고 자조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학술지 구입 비용과 구독 자료 수

서울대 학술지 구입 비용과 구독 자료 수

한 해외 출판사 관계자는 “과거엔 인상 폭이 큰 적이 있었지만, 최근엔 적정 수준만 인상한다”며 “대학들이 개별 협상하는 방식보단 컨소시엄 등으로 공동 협상에 나서면 가격 면에서 유리해지는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두 번 돈 받는 학술지=학계에서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는 글로벌 출판사가 논문을 게재할 때 게재료를 받고 구독할 때 또 돈을 받는 ‘이중 지불’이다. 김환민 KISTI 책임연구원은 “우리나라가 교신 저자 논문 기준으로 세계 8위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해외 논문 구독료와 별도로 논문 게재료도 크게 늘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학자 입장에선 논문을 실을 때 돈을 내야 하고 구독하면서 돈을 또 내는 이중 지불 구조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OA 방식이다. 논문을 게재할 때 비용을 내지만 해당 논문은 세계에서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연구자들도 무료로 다른 나라의 OA 논문을 보게 된다. 이럴 경우 현재 1800억원에 이르는 한해 논문 구독료가 5년 뒤 400억원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정부는 비용 확 줄일 OA 추진해야

문제는 해외 학술지들이 수입 감소 등을 우려해 OA 확대를 거부하는 사례가 많다. 이 때문에 국가가 주도해 협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정경희 한성대 크리에이티브 인문학부 교수는 “이미 학술지의 가격이 지나치게 오르기 때문에 도서관 예산이 오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본질적인 방안으로 OA가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논문을 쓰는 건 단행본과 전혀 다르다”며 “논문을 쓴 어떤 저자도 자기 논문이 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형 출판사를 상대로 OA를 관철한 유럽 국가들은 정부가 주도해 논문 구독 중단을 강행하는 등의 진통을 겪었다. 김명환 전 관장은 “유럽에선 20년 전부터 OA 운동을 지속해 최근 큰 성과를 내고 있다”며 “독일 등 각국은 대학 등이 원하는 방식으로 출판사들과 OA 전환계약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대학 10개 캠퍼스가 2019년부터 엘스비어(세계적 출판사)와 재계약을 하지 않고 2년 가까운 보이콧 끝에 원하는 조건으로 OA 전환계약을 이뤘다”고 했다. 이를 추진하려면 정부가 중심이 돼 세계 유력 학술지들과 협상을 이끌어야 하나 진척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해외학술지 "우리도 의향"=해외 출판사 입장이 궁금해 세계적 학술지의 한 관계자를 접촉했다.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그는 "우리는 OA를 적극적으로 하려 하며 실제로 한국에서도 작은 규모의 컨소시엄과 OA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유럽 등지에서 OA가 활발한 이유는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요구하기 때문에 금방 진척된다"며 "출판사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는 OA 논의가 얼마든 가능하다"고 말했다.

결국 한국에서 책임 있는 관계자가 협상을 주도하지 않아 온 탓이라는 얘기다. 지난 정부에서 한국판 뉴딜로 추진했던 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이와 관련, OA 전환을 강력히 주장했던 김명환 전 관장은 “지난 정부가 말로는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별로 한 게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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