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강주안의 시선

‘보수 흑역사 전시관’ 된 역사박물관

중앙일보

입력 2022.05.30 00:30

업데이트 2022.05.30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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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역사를 악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권력자를 경계한 건 캐나다 출신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이다. 그는 저서 『역사사용설명서』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의 지도자가 역사를 오남용한 사례를 고발했다. 우리 역시 정권에 따라 상반된 역사를 마주해야 했다.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그 전장(戰場)이다.

 2012년 12월 26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행사에 참석했다. 앞쪽에 보이는 이 전 대통령의 친필이 담긴 표석을 2019년 박물관 측이 철거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2년 12월 26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행사에 참석했다. 앞쪽에 보이는 이 전 대통령의 친필이 담긴 표석을 2019년 박물관 측이 철거했다. [사진공동취재단]

MB 친필 표석 3년 전 사라져

2012년 12월 문을 연 박물관은 이명박(MB) 정부가 건립을 추진할 때부터 공격을 받았다.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일방적 개관을 중지하고 원점에서 새롭게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를 거친 역사박물관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27일 오후 현장을 찾았을 때 박물관 앞 MB 친필 표석이 놓였던 자리에 눈이 갔다. 2019년 박물관 측은 이 표석을 치웠다. 박물관 관계자에 문의하니 "표석을 돌려놓을 계획이 없다"고 한다.

입구 벽면의 ‘박물관 건립취지문’은 남았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 근현대사 100년의 생생한 자료들이 눈물겹고 자랑스러운 이야기와 함께 모여 있다’고 적혀있다. 박물관 안에서 만난 전시물은 정반대다. 5층 역사관에 흐르는 기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보수 정부의 흑역사’다. ‘눈물겹고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를 유신ㆍ독재ㆍ외환위기로 채웠다.

곳곳에 외환위기ㆍ유신 비난

광복 시기 인물을 소개한 전시물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김일성의 비중이 대등하다는 점이 낯설다. 전쟁이 남긴 상처로 국민보도연맹, 한강 인도교 폭파, 노근리 사건, 거창 사건 등 우리 측에 의해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을 더 많이 소개한다.

경제 개발과 성장은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 강요’가 핵심이다. 외환위기 전시에 상당한 공간을 할애한 점도 의외다. 전시 영상물 중엔 ‘국가 부도의 날’이 있다. ‘응답하라 1994’ ‘미생’ 같은 드라마가 외환 위기와 관련된 작품이란다.

부끄러움은 어느 정부에나 있다. 진보 정권도 그렇다. 역사박물관에 전시하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 때 ‘대북 송금 특검 수사’로, 김대중(DJ)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에 즈음해 북한에 거액의 현금을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국가정보원까지 동원해 외국 은행을 거쳐 은밀하게 북한으로 송금했다. DJ 정부 최고 실세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여기에 관여했던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은 대검 수사를 받다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정부가 특별 부스를 만들어 이 내용을 전시한다면 지탄받아 마땅하다.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확진자 세계 1위’를 기록한 일, "백신을 늦게 맞아서 다행 " "2주간 짧고 굵게" 같은 발언으로 역사관을 꾸미겠다면 뜯어말려야 한다. "영광스러운 역사가 있는 나라야말로 진정 행복한 나라"라고 연설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충고를 따르진 못할망정 특정 정부의 흑역사를 끌어모은 ‘자학 박물관’이 필요한가.

"편향" 욕하더니 역사 물갈이

윤석열 정부는 이 전시물을 유지할 수 있을까. ‘네트워크 사회의 변화’를 들어가 보니 ‘나는 꼼수다’로 연결되는 QR 코드가 뜬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오세훈 후보의 ‘생태탕’ 보도에 집중하고 이번 대선 땐 김건희 여사 비판에 앞장선 김어준씨의 편향적 콘텐트를 인내하긴 무리일 거다. 드루킹 사건 항목에 연결된 기사는 ‘김경수 지사는 드루킹의 주장처럼 불법행위 교사자이거나 공동정범이 아니라 피해자라는 주장’을 소개한다.

그렇다고 전시물을 정반대로 뒤집으면 문재인 정부와 다를 바 없다. "당파성을 넘어서서 팩트에 집중해야 하며 이전 권력이 했던 일은 다 부정하는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는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의 말이 타당하다.

역대 대통령 표석들을 찾아 29일 오전 청와대를 돌아봤다. 본관과 관저 코앞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표석이 큼지막하다. ‘건축자 프리미엄’이다. 관람로를 따라 역대 대통령의 식수 표석이 나타나는데, 문 전 대통령 이름은 두 번 보인다. 하나는 2019년에, 다른 하나는 지난달에 심었다. 윤 대통령이 청와대를 개방하기 직전에 문 전 대통령이 심은 나무의 표석은 관람 동선상 잘 보이는 명당에 있다. ‘대통령 문재인 김정숙’이라고 부인의 이름을 함께 적은 점도 눈에 띈다. 문 전 대통령 반대자로 보이는 할머니가 표석 옆을 지나가면서 가족들에게 "뭘 잘했다고 온 데다 이름을 박아놨네. 다 뽑아내야 한다"고 언성을 높인다. 그래선 안 된다. 자신의 눈에 거슬린다고 전직 대통령의 표석을 일방적으로 치우면 증오만 쌓일 뿐이다.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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