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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피살 21개월 만에 이름 찾은 이대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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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지난해 5월 20일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기념관을 찾았다. 문 전 대통령은 세계 대공황 시기에 ‘뉴딜 정책’으로 미국 경제를 부흥한 업적을 언급하며 “대선 때 루스벨트 전 대통령을 롤모델로 제시했었다”고 말했다. 뉴딜 정책의 성과엔 이론이 없다. 그러나 ‘한국형 뉴딜’이 성공적이며 “오히려 미국이나 일본보다도 앞서는 국가로 평가”를 받는다는 문 전 대통령의 자평(JTBC 인터뷰)은 민망하다.

문재인 정부가 정치적으론 미국 유일의 4선 대통령으로 민주당의 약진을 견인한 루스벨트를 따라가는 듯 보이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이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에서 압승을 이어갈 때까진 그랬다. 두 대통령의 유사점을 보여주는 기사들도 나왔다. 그러나 지난해 재보선 패배에 이어 올해 대선과 지방선거까지 연패하면서 비교가 머쓱해졌다.

롤모델과의 차이가 극명한 분야는 안보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전면전에 나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사망한 루스벨트는 일본의 항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을 선공했던 일본은 지구 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자탄 피폭의 비극을 맞았다.

루스벨트가 1941년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 담은 ‘네 가지 자유’는 국제 사회에서 인권의 징표가 됐다.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이 중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안보와 직결된다. 루스벨트는 군축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공포를 꺼냈지만, 자국민이 공격을 당하자 정면 대응을 불사했다.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이 2020년 9월 북한군의 총격으로 살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의 아들을 만나 위로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이씨 아들 휴대전화에 남은 이씨와의 마지막 통화 기록. 이 통화 직후 이씨는 실종됐다. [유족 제공]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이 2020년 9월 북한군의 총격으로 살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의 아들을 만나 위로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이씨 아들 휴대전화에 남은 이씨와의 마지막 통화 기록. 이 통화 직후 이씨는 실종됐다. [유족 제공]

북한과 군사적 대치 상태인 우리 역시 수시로 공포에 직면한다. 문재인 정부가 국민의 공포를 대하는 방식을 보여준 사례가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이다. 북한군이 남한 주민을 고의로 사살하고 시신을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북한은 아무런 응보를 받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도리어 피해자인 공무원에게 ‘월북자’ 낙인을 찍었다.

끔찍한 죽음 당하고 월북자 누명

이 사건에서 자진 월북 여부는 쟁점이 될 수 없다. 월북자였건, 사고자였건 총으로 쏜 행위는 살인이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당시 북한에 코로나19와 관련해 국경에서 움직이는 건 사살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상황에서 아무도 방침을 안 정해주고 (공무원에게) 자살하라고 할 수도 없으니 총으로 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코로나19도 살해 사유가 못 된다. 설사 감염자라 해도 그를 사살한 행위는 중한 범죄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이 바다에 빠진 채 북한군에 끌려다니는 동안 맞서기는커녕 구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모든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 국민을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는 "이명박 정부가 초반엔 북한·중국과 교류가 활발했다"며 "천안함 폭침으로 분위기가 급변했다"고 말한다.

김대중 정부는 연평해전 당시 우리 군인에게 가해진 총격에 맞대응하면서 나름의 원칙을 지켰다. 이 룰이 공무원 피살 사건에서 무너졌다. 월북자로 몰린 공무원은 이름도 없는 A씨가 됐다. 국방부와 해경이 지난 16일 자진 월북의 증거가 없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1년 9개월 만에 A씨는 이대준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가족은 이제야 장례를 준비한다.

“월북 근거없다” 발표에 장례 준비

정권 교체로 결론이 뒤집혔다는 일각의 주장과 달리 ‘자진 월북 단정’이 억지라는 사실은 문재인 정부의 인권위가 이미 밝혀냈다. 인권위는 지난해 6월 22일 "추측과 예단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여 공정한 발표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관련 정보를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문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 인터뷰에서 "한 건도 북한과 군사적 충돌이 없었다"고 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론하며 "아까운 우리 군인들, 심지어 민간인까지 희생되는 그런 안타까움이 있었죠"라고 말했다. 이대준씨 피살 사건은 증발했다. 이씨의 부인은 "남편에 대해 ‘월북을 했기 때문에 죽인 건 당연한 거다’는 얘기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씨 가족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비난과 공격에 시달리며 두려움을 호소한다. 북한의 범죄를 대하는 지난 정부의 방식이 초래한 개인의 공포다.

거세진 가족 비난에 두려움 호소

그렇다고 남한을 짓누르는 공포가 완화하지도 않았다. 북한의 SLBM·ICBM·SRBM·방사포는 연일 한반도 상공과 바다를 휘젓는다. 핵실험은 단추를 누르는 일만 남았다.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더 아득해졌다. 루스벨트가 롤모델이라는 말이 아직 유효한가. 그렇다면 이제라도 월북자 주장을 철회하고 지지자들에게 이씨와 가족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고 해야 한다. 손톱만큼이나마 롤모델에 가까워지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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