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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전직 대통령 문재인'이 받게 될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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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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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문재인’이란 이름에서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을 떠올린다. 이날 이명박 당시 대통령(MB)이 헌화하려 하자 백원우 전 의원이 MB를 향해 “사죄하라”고 소리치며 달려들다 경호원들에게 붙잡혀 입이 막혔다. 직후 MB에게 다가가 사과하는 문 대통령을 보면서 사람들은 통합의 기대를 품었다.

9년이 흘러 2018년 3월 22일 MB는 서울 동부구치소에 수감됐다. 문 대통령 취임 10개월 만이다. 문 대통령 관점에서 MB의 구속이 우연인지, 의도인지, 미필적 고의인지는 모른다. 다만 문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는 날까지 MB를 풀어주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해 당선인으로 활동한 시간은 찰나에 가깝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따른 보궐선거였기에 5월 9일에 투표하고 10일 취임했다. ‘문재인 당선인’ 역할은 고작 몇 시간이었다. 이 짧은 순간에 그는 큰 약속을 한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가운데, 이하 당시 직함)이 2017년 5월 9일 밤 서울 광화문 세종로소공원에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부터),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의원, 이재명 성남시장, 최성 고양시장과 손을 맞잡고 기뻐하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가운데, 이하 당시 직함)이 2017년 5월 9일 밤 서울 광화문 세종로소공원에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부터),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의원, 이재명 성남시장, 최성 고양시장과 손을 맞잡고 기뻐하고 있다. [중앙포토]

당선인 때 "야당 손 잡겠다" 약속

9일 오후 11시 43분 문 당선인은 세종로 공원 단상에 올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그분들(경쟁 후보)과도 손잡겠다”며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도 섬기는 통합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임기 첫날 여의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당사를 방문했다.

5년이 지났다. 문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청와대 출입기자단을 포함해 여러 언론인을 만나 소회를 밝혔다. 그중 “최고 수준의 대담”(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이라는 손석희 JTBC 전 앵커와의 대화에선 속마음이 읽힌다. 비판 하나하나에 반론을 편 문 대통령이지만, ‘통합’에 대해선 답이 궁색했다. “편가르기 정치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인정해야 되겠지만…”이라며 넘겼다.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의결ㆍ공포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은 제1야당이자 차기 집권당을 짓밟았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균형점을 찾기 위한 청와대 민정수석ㆍ법무부장관ㆍ행정안전부장관ㆍ검찰총장ㆍ경찰청장의 오랜 숙의를 헛것으로 만들었다. 문 대통령 머리를 채웠던 통합은 왜 자취를 감췄을까.

갈등 커지고 후임자에 반감 표해 

인터뷰를 뜯어보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한동훈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분노가 읽힌다. 두 사람에 대한 원망을 전제하면 많은 의문이 풀린다. 윤 당선인의 집무실 이전을 비난하는 모습부터 그렇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습니다.” 문 대통령의 취임사다. 이제 와선 공약 무산을 "잘한 결정"이라고 강변한다. "굳이 이전하면 비용이 들기 마련이고 행정 혼란도 초래될 수밖에 없다"는데, 정작 청와대 홈페이지에선 여전히 국정과제다.

문 대통령이 한 후보자를 언급할 땐 "편하게 국민을 들먹이면" 같은 거친 어휘가 튀어나왔다. 자신이 두 검사를 발탁하면서 쥐여준 칼이 조국 전 법무부장관으로 향할 때 엄습했을 배신감은 짐작이 간다.

윤 당선인을 두고 "다른 당의 후보가 되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 되었다. 발탁이 문제였나, 그분을 우리 편으로 잘 했어야 됐나…"고 한 토로에서 생각의 혼란이 묻어난다. 누구보다 과정을 강조해온 문 대통령이 검사들을 궁지로 모는 입법 과정에서 위장 탈당이나 회기 쪼개기 같은 술수에 동승한 이면에 이런 심경도 한몫했으리라.

통합을 빼면 문 대통령은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소득주도 성장과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전혀 잘못됐다"면서 "고용은 크게 늘었고, 경제는 훨씬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을 다 수용해도 통합의 공약은 미완으로 남는다.

미움 털고 퇴임 후 '통합' 나서길 

오늘(9일) 오후 6시 청와대를 떠나고 나면 전직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가 통합이다. 두 검사에게 품은 미움만 털어내도 5년 전 초심을 되살릴 수 있다. 대통령으로서 억울하게 느꼈던 사안을 야당이 될 ‘친문’ 정치인에게 잘 설명하면 변화의 계기가 된다. 가령 인사 지적에 항변한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새롭게 불거진 문제가 있다 해서 청와대 검증의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나, "우리 인사청문회는 도덕성 검증에만 매몰돼 이른바 망신주기 청문회가 되는 거다" 같은 내용들이다.

자신의 열성 지지자에게 "진정한 지지는 확장되게 하는 지지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부단히 전달해 문자 메시지ㆍ댓글 테러를 줄여나가도 훌륭하다. 퇴임 대통령으로서 이례적인 45%의 지지율은 통합으로 나서는 길에 견인차다. 문 대통령이 내일 오르게 될 ‘전직 대통령’ 자리는 임기가 무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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