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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가 밥값 낸다···'우렁경찰' 만든 말, 승진 안할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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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소문 포럼] 승진 안 할 거야?  

강주안 중앙일보 사회에디터.

강주안 중앙일보 사회에디터.

“요즘 경찰청에서 ‘더치 페이’ 캠페인 하는 거 알아요?”

부하직원이 상사 밥값 내는 경찰 관행, 스폰서 설치는 토양 #구내식당·더치페이 바람직 … 불가피할 땐 상급자가 밥 사야

얼마 전 만난 경찰 간부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듣고 보니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경찰관에게 밥값을 각자 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지금은 누가 산다는 얘기일까.

2000년 여름, 처음 경찰청 취재를 담당하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의욕적으로 경찰 간부를 만나려다 보니 회식 자리에 끼는 일이 잦았다. 한데 가끔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데 아무도 돈을 내지 않는 것 아닌가. 먼저 내보려 해도 이미 계산이 끝났다고 한다. 누가 밥값을 냈을까. 궁금증은 몇달 지나 풀렸다. 포장마차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경찰 간부가 느닷없이 물었다.

“강 기자, 경찰과 기자가 다른 게 뭔지 알아요?”

“몰라요.”

“기자들은 밥 먹으면 윗사람이 사지? 경찰은 아랫사람이 냅니다. 그게 달라요.”

만취한 그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요즘 내가 돈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비로소 오랜 의문이 해소됐다. 경찰 간부들이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이 스르르 계산대로 가 밥값을 내는 ‘우렁 경찰’들이 있던 거였다. 술김에 비밀을 털어놓은 그도 ‘우렁 경찰’이었다.

유심히 관찰하니 진짜 그랬다. 2차 자리에 합류하는 부하도 있고, 잠시 인사만 하고 사라진 경찰도 있었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사람까지 모두 ‘우렁 경찰’이었고 대부분 승진을 향해 뛰던 사람들이었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경찰관 월급으로 그 많은 밥값, 술값을 내는 건 누가 봐도 무리였다. 돈에 쪼들리는 ‘우렁 경찰’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가 있다. 대체로 사업을 한다는 그들을 경찰에선 ‘애국자’라고 불렀다. 애국자가 경찰서에 출몰하는 날이면 최고급 식당에서 한우 안심을 굽거나 자연산 광어회를 뜨는 회식이 열렸다.

경찰에서 통용되는 ‘애국자’라는 단어를 인공지능 한영사전에 입력하면 ‘sponsor(스폰서)’라고 번역할 거다. 퇴근 무렵이면 전국 경찰 관서에 애국자들이 버글버글했다. 이따금 애국자가 변심하는 날엔 전도유망한 경찰관이 옷을 벗었다.

이 모든 풍경이 흘러간 옛이야기라 생각했는데 ‘더치 페이’ 캠페인을 한다니 19년 전에 목격했던 ‘우렁 경찰’이 아직도 밥상을 차리고 있다는 얘기인가. 여기저기 물어보니 이젠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상관에게 밥 사는 문화가 많이 바뀌었고 ‘애국자’도 확 줄었단다.

그럼에도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영화 ‘극한직업’ 관람 중 깨달았다. 마약반 형사를 적나라하게 그려내 1500만 관객을 돌파한 이 영화에는 허황된 장면이 많지만 승진을 향한 경찰의 집착만큼은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상관이 만년 반장에게 던지는 “승진 안 할 거야?”라는 대사는 많은 ‘우렁 경찰’의 호주머니에서 밥값을 덥석 꺼내게 하던 바로 그 한마디 아닌가.

경찰관에게 “왜 윗사람에게 밥을 사야 하느냐”고 물으면 2000년에도, 2019년에도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 “승진 때문”이다. 심사를 통해 승진하려면 근무성적평정이 중요하다. 1차, 2차, 3차 평가 중에서 특히 1차 평가자, 즉 직속 상관의 배점이 가장 크다. 그러니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심을 쓰는 풍토가 잘 근절되지 않는다. 아직도 부하에게 많은 걸 바라는 간부가 더러 보인다고 한다. 이들이 자주 던지는 멘트가 “승진해야지?” “올해 승진할 차례지?” “승진 안 할 거야?”라고 한 경찰 간부는 말했다. 조직 차원으로 보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랫사람이 밥을 사도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라는 얘기가 나온다.

관행에는 뿌리가 있다. ‘우렁 경찰’을 낳은 장본인은 ‘뒷돈’이라는 분석이 있다. 경찰이 민간인에게 용돈 받는 일이 흔하던 시절, 교통단속을 하던 경찰관이 차에 받혀 병원에 실려 갔는데 신발을 벗기니 현금이 쏟아졌다는 ‘장화현금전(傳)’이 회자하던 시대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현장을 뛰는 직원들은 민원인을 많이 만나지만 내근 계장이나 과장은 외부인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 봉투를 많이 받는 부하들이 밥값을 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상이 달라져 봉투를 주는 민원인도, 받는 경찰관도 줄었다. 그런데도 조직의 관성은 일부 남아있다. 세금 떼고 한 달에 300만원 남짓 손에 쥐는 일선 경찰관이 승진을 꿈꾸는 1년 동안 밥을 사야 한다면 가족들은 무얼 먹고 사나.

캠페인 지침대로 구내식당에서 먹거나 더치 페이를 하는 게 옳다. 그러나 누군가 한 명이 내야 한다면 이젠 경찰도 윗사람이 내라. 직책 간부에게 부서회의비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돼야겠지만 그게 당장 안돼도 일단은 윗사람이 사라. ‘모든 잘못된 전례(前例)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애써 바로잡아 고쳐야 하고, 간혹 그중에서 개혁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나만은 그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凡謬例 之沿襲者 刻意矯革 或其難革者 我則勿犯)’는 다산(茶山) 정약용의 가르침(『목민심서』)도 있지 않은가. ‘우렁 경찰’은 이제 전설 속으로 스르르 떠나보내자.

강주안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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