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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통합은 다이어트만큼 어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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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2019년 7월 25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신임 검찰총장이던 윤석열 당선인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9년 7월 25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신임 검찰총장이던 윤석열 당선인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 곳곳에서 무슬림을 겨냥한 증오 범죄가 발생했다. 댈러스에 살던 당시 31살의 석공 마크 앤서니 스트로먼은 테러 나흘 뒤 편의점에서 햄버거를 굽던 파키스탄 이민자를 총으로 쏴 죽였다. 계속된 범행은 주유소에서 인도 이민자를 살해한 뒤 체포되면서 끝났다.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재판 내내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증오와 복수심이 파멸로 이어진 사례들을 저서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담은 사람은 프릿 바라라 전 뉴욕남부지검장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측근들을 수사하다 검찰에서 쫓겨난 바라라 전 지검장의 책은 검사의 필독서로 꼽힌다.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 관련 재판을 비롯한 여러 상황에서 검사들은 바라라 전 지검장을 인용했다.

미움과 복수심이 사회에 미치는 폐해를 떠올리면서 대선이 끝나도 갈등이 증폭되는 현실을 걱정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우린 통합을 가장 강조한 대통령과 최근 5년을 지냈다.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을 포함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거짓이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번 대선 직후에 나온 문 대통령의 통합 발언도 그렇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문 대통령의 통합 걱정은 진심이라고 본다. 다만 실패했을 따름이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다이어트 흑역사와 비슷한 구조를 발견한다.

말은 쉽지만 눈물 나는 노력 필요

사람들이 “살을 빼겠다”고 말하는 건 진심이다. 의사의 처방은 간단하다. 운동은 필수고 과식은 금물이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면 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살 빼야 하는데…”라고 말하면서 소파에 누워 과자를 물고 넷플릭스 시리즈를 정주행한다. 살은 더 찐다.

통합의 매커니즘도 흡사하다. 반대편 얘기를 경청해야 한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공격하지 말고 우리 편에만 이득을 몰아주면 안 된다. 말은 쉽지만, 실천에는 본능을 거스르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이쯤 되면 왜 문 대통령이 “통합이 중요한데…”라고 되뇌는데도 갈등의 골은 나날이 깊어졌는지 짐작이 가리라.

윤석열 당선인의 통합 강조는 전임자보다 더하다. 그렇다면 그는 통합을 해낼까. 대선 후 윤 당선인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공약 실천 행보다. 청와대 탈출과 여가부 폐지처럼 보수 진영에서조차 우려가 나오는 공약을 무섭게 밀고 간다. 이런 돌파력으로 통합을 추진한다면 어떤 방식일까. 통합도 밀어붙여서 쟁취가 가능한 것일까.

상대 존중하고 우리 편 손해봐야 

다시 바라라 전 지검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9·11 직후 증오 범죄 피해자 중엔 스트로먼에게 산탄총으로 얼굴을 맞은 라이스 부이얀이 있다. 방글라데시 이민자인 그는 피격 순간을 "갑자기 벌 100만 마리가 얼굴에 일제히 벌침을 쏘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얼굴·머리·안구에 탄알 38개가 박혔다. 독실한 무슬림인 그는 놀랍게도 스트로먼의 사형 집행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아빠를 잃게 될 스트로먼의 아이들을 걱정했다. 관용은 전파됐다. 사형 선고에도 꿈쩍 않던 스트로먼은 범행 10년 만에 이뤄진 사형 집행 며칠 전 "저한테 목숨을 빼앗길 뻔했는데도 저를 구하겠다고 나선 부이얀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에 퍼진 증오는 사라져야 합니다. 증오는 평생 고통을 낳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극형도 풀지 못한 분노를 녹인 건 용서였다.

윤 당선인 측에 쌓인 원한은 짐작이 간다. 그와 가족을 궁지로 몰려는 시도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측근인 한동훈 검사장 역시 막무가내식 공격을 받았다. 형법과 형사소송법에 관한 한 이들과 대적할 사람은 별로 없다. 이미 머릿속에서 '가해자'들에 대한 의율 구상을 정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새 정부가 현 정부처럼 지난 정권 토벌에 나선다면 많은 전리품을 챙길 수도 있다. 이 모습을 보며 박수 칠 사람도 많다.

힘으로 밀어붙여 달성 가능할까 

그러나 윤 당선인이 약속한 통합은 멀어지게 된다. 오늘 문 대통령과 만찬 약속을 잡았지만, 요 며칠 더불어민주당과의 파열음이 요란했다. 통합의 공약은 청와대 탈출이나 여가부 폐지와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이행하기 어렵다. 힘으로 관철할 묘안을 감춰둔 게 아니라면 바라라 전 지검장의 책을 다시 꺼내 실질적 정의의 의미를 상기하면 어떨까.

"법은 놀라운 도구이지만 한계가 있다. 반면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한계가 없다. (중략) 법은 증오를 없애지도 악을 정복하지도 못한다. 은총을 가르치거나 걱정이 사라지게 하지도 못한다. 법 그 자체로는 이런 것들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다. 용감하고 강인하며 보기 드문 인간들이 이것을 이뤄낸다."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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