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청 황실 우대 회복시킬 것”…푸이 “못 믿을 사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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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4〉 

9·18사변 2개월 후인 1931년 11월 중순, 국민정부 수도 난징(南京)에서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만난 국민당 중앙군사위원장 장제스(오른쪽)와 부위원장 장쉐량. [사진 김명호]

9·18사변 2개월 후인 1931년 11월 중순, 국민정부 수도 난징(南京)에서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만난 국민당 중앙군사위원장 장제스(오른쪽)와 부위원장 장쉐량. [사진 김명호]

1924년 11월 5일, 베이징정변에 성공한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이 푸이(溥儀·부의)를 쯔진청(紫禁城)에서 축출했다. 일본 공사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사관에 거처를 마련하고 성명을 냈다. “선통제(宣統帝)를 우리가 보호 중이다.” 뒤죽박죽이던 중국 천지가 더 복잡해질 징조였다.

1993년 7월, 베이징의 저명한 문화인 예주푸(葉祖孚·엽조부)가 푸이와 일본의 인연을 구술로 남겼다. “일본은 푸이에게 눈독을 들였다. 환관들의 방해로 접근이 쉽지 않았다. 뇌물을 써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푸이가 영국 유학자금 마련하기 위해 젠푸궁(建福宮)에 쌓여있는 서화(書畵)를 외부로 빼돌리자 환관들이 장난을 쳤다. 모조품을 진품과 교체했다. 한 도시를 사고도 남을 보물들이 골동품 시장에 나돌았다. 1923년 6월 27일, 젠푸궁이 화마(火魔)에 휩싸였다. 건물 6채가 잿더미로 변했다. 일본 공사가 푸이의 측근을 매수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한 환관(宦官)들 소행이다. 황제에게 보고해라.’ 푸이도 짚이는 바가 있었다. 환관 700명을 쯔진청에서 내쫓았다. 이 일을 계기로 푸이는 일본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3개월 후 일본 관동지방에 대형지진이 발생하자 미화 30만 달러를 지원했다. 이듬해 봄, 일본을 거쳐 중국에 온 인도의 시철(詩哲) 타고르에게 일본 얘기 나누며 장시간을 보냈다.”

장제스의 북벌군엔 별난 지휘관 많아

동북 도착 후 관동군 수뇌부와 마주한 푸이(오른쪽 둘째). 오른쪽 넷째가 정샤오쉬. 만주국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동북 도착 후 관동군 수뇌부와 마주한 푸이(오른쪽 둘째). 오른쪽 넷째가 정샤오쉬. 만주국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1925년 2월, 일본 공사관에서 20세 생일을 보낸 푸이는 텐진(天津)의 일본 조계로 거처를 옮겼다. 일본 총영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푸이를 홀렸다. ‘일본인 소학교’ 참관을 청했다. 일정을 마친 푸이는 양편에 도열한 학생들의 ‘황제폐하 만세’에 감격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군벌 전쟁으로 전화(戰火)가 텐진 을 압박했다. 조계의 각국 주둔군이 연합군을 결성하자 불안해하는 푸이를 일본 주둔군 사령관이 안심시켰다. “중국 군대가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 폐하는 마음을 놓기 바란다.” 신문에 실린 일본군 참모의 기고도 푸이를 들뜨게 했다. “중국의 혼란은 황제가 없기 때문이다. 난국을 수습할 사람은 청 제국의 황제 선통제 외엔 없다.”

푸이는 일본군의 존경과 지지에 으쓱했다. 막강한 일본군과 손잡으면, 청 황실이 다시 일어나는 것(復辟·복벽)은 시간문제라고 확신했다. 천장절 기념식에도 빠지지 않았다. 열병을 마친 일본군 사령관이 다가와 경례하자 참석자들과 함께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열창했다. 동북에 사람을 파견해 정황을 살피게 했다. 반응이 빨랐다. 2개월 후, 동북의 최강자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 텐진에 왔다. 푸이에게 아홉 번 절하고 황금 9,900냥(兩)을 바쳤다. 황제 예우를 받자 기분이 좋았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지휘하는 북벌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뤼순(旅順)에 있던 청의 유로(遺老)들이 편지를 보냈다. 뤼순으로 오라는 간곡한 내용이었다. 푸이는 일본을 믿었다. 유로들의 청을 거절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만주 전 지역 조사에 열중했다. 싱안링(興安嶺) 산간을 답사 중인 일본 관동군. [사진 김명호]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만주 전 지역 조사에 열중했다. 싱안링(興安嶺) 산간을 답사 중인 일본 관동군. [사진 김명호]

측근 정샤오쉬(鄭孝胥·정효서)를 일본에 파견했다. 일본에 간 정은 분주했다. 우익단체 흑룡회(黑龍會)와 참모본부의 대표적인 인물과 회담하며 복벽 지원을 호소했다. 귀국한 정은 푸이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생각지도 않았던 대형사건이 터졌다. 북벌군에게 밀려 동북으로 돌아가던, 북양 정부 국가원수 장쭤린의 전용 열차를 일본 관동군이 날려버렸다. 북벌군에는 별난 지휘관이 많았다. 존재감이 약한 쑨덴잉(孫殿英·손전영)이첸룽(乾隆·건륭)황제와즈시(慈禧·자희)태후의 능을 도굴했다. 푸이는 조상 볼 면목이 없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복수를 다짐했다. 동생 푸제(溥杰·부걸)와 처남 룬치(潤麒·윤기)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오스트리아 귀족도 고문으로 위촉했다. “현지에서 서구의 중국관련 정보를 수집해 보고해라.” 동북의 실력자들도 회유했다.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후계자로 추대한 지린(吉林)성 주석 장쭤샹(張作相·장작상)과헤이룽장(黑龍江)성 주석 장징후이(張景惠·장경혜) 등, 동북의 원로들은 푸이가 보낸 친필서신과 선물 받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후들거리는 다리 버티며 텐진을 향해 아홉 번 절하고 주저 앉았다.

1931년 7월 10일, 9·18사변 2개월 전, 일본 육군 사관생도 푸제가 푸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본은 장쉐량에게 불만이 많다. 후일을 도모할 계획에 착수하기 바란다.” 푸이는 물난리 난 지역부터 챙겼다. 큼지막한 상자에 진주를 가득 담아 수해지역 지방관들에게 보냈다. 일본은 ‘황제의 혈통은 어쩔 수 없다’며 푸이를 높이 평가했다. 9월 30일, 텐진주재 일본군 사령관이 푸이를 방문, 큰 봉투를 전달했다. 지린성 주석 장쭤샹의 참모장 시차(熙洽·희흡)가 보낸 편지였다. “장쭤샹은 부재중이다. 희생자 없이 성 전역을 관동군에게 내줬다. 장쉐량의 폭정(暴政)에 동북인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다. 조상의 발상지에 돌아와 일본의 도움으로 만주를 점거한 후 중원으로 진출하자. 선양(瀋陽)에 도착하는 즉시 지린성은 복벽을 선언하겠다.” 시차는 청 황실의 후예였다. 시차의 편지를 받은 날 밤, 일본 측이 푸이에게 동북으로 갈 것을 건의했다.

동생 푸제 “일, 장쉐량에게 큰 불만”

1931년 겨울, 만주의 농촌풍경. [사진 김명호]

1931년 겨울, 만주의 농촌풍경. [사진 김명호]

11월 2일 오전, 장제스가 푸이에게 특사를 파견했다. “청 황실 우대조건을 회복시키겠다. 텐진을 떠나지 말기 바란다.” 푸이가 특사에게 했다는 장제스의 인물평을 소개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수완이 악랄하고 지독하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발처(髮妻)를 버리고 천하디천한 미국의 앞잡이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결혼한, 근본이 없는 사람이다. 일본이 두렵다 보니 나와 일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안달이다. 내가 장의 말을 수용하면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황제 칭호 주고, 나를 농락한 후 제거할 심산이다. 답변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다.”

같은 날 밤 푸이는, 중국인 복장으로 텐진에 온 일본 관동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겐지(土肥原賢二)와 밀담을 나눴다. 일단 선양에는 가기로 합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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