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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찾던 일 관동군, 푸이에게 ‘만주제국’ 타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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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5〉 

일본 관동군은 만주군에게 총 대신 죽도를 지급했다. 1932년 가을, 만주군 건군기념 분열식. [사진 김명호]

일본 관동군은 만주군에게 총 대신 죽도를 지급했다. 1932년 가을, 만주군 건군기념 분열식. [사진 김명호]

만주(동북)는 발해(渤海), 요(遼), 금(金), 청(淸)이 국가를 건설한, 중국과 무관한 지역이었다. 중국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후에도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 통치한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가 한 국가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중국은 일본타도와 공산당타도가 최우선이었다. 만주는 달랐다. 공산당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만주에 기반이 약했다. 강대국 소련과 일본 사이에 끼어있다 보니 특수한 외교정책 취하지 않으면 안전 유지가 불가능했다. 전문 관료들이 ‘보경안민(保境安民)’, 영토 수호와 국민의 안전을 역설하며 양책을 진언했지만 만주의 지배세력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관(山海關·산해관)내에 진출해 천하를 호령했던 기마민족의 전철을 밟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0년대 만주 콩 생산 전 세계의 60%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에 서명하는 만주국 초대 총리 정샤오쉬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莊繁). 1932년 8월 18일,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 [사진 김명호]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에 서명하는 만주국 초대 총리 정샤오쉬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莊繁). 1932년 8월 18일,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 [사진 김명호]

일본 관동군은 만주가 농산물과 자원의 보고라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1920년대 만주의 콩 생산량은 전 세계의 60%였다. 벌목이 가능한 36억m³의 목재와 250억t의 석탄, 철광 20억t이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주의 문인 관료들이 제창한 ‘보경안민운동’은 ‘만주독립운동’과 별 차이가 없었다. 군벌의 몰락과 구세주의 출현을 기대하던 만주인들을 들뜨게 하였다. 일본 군사 엘리트의 집결지 관동군의 좌관급(우리의 영관급) 참모들은 자신이 만주의 구세주라고 자임했다. 하늘이 낸 보물창고에 식민지가 아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면 인간 낙원을 만들 수 있다고 착각했다. 무력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국가원수 감을 물색했다. 황제 자리에서 두 번 물러난 후 텐진(天津)에 체류 중인 26세의 청년 푸이(溥儀·부의) 외에는 적합한 인물이 없었다. 만주에 끌어들이기만 하면 회유는 시간문제였다. ‘동방의 로렌스’ 도이하라겐지(土肥原賢二)가 총대를 멨다. 도이하라는 열아홉 살 때 중국에 첫발을 디뎠다. 18년간 관동군에 근무하며 장쭤린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군벌 전쟁 시절 장을 지원한 것도 도이하라고 장의 폭사(爆死)도 도이하라의 작품이었다. 9·18 만주사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중국 방언을 자유롭게 구사했고 광활한 만주벌판을 제 손바닥 보듯 하던, 일본 군부의 대표적인 중국통이었다.

텐진거주 시절의 푸이(오른쪽)와 정샤오쉬. [사진 김명호]

텐진거주 시절의 푸이(오른쪽)와 정샤오쉬. [사진 김명호]

1931년 11월 2일 밤, 푸이를 만난 도이하라는 건강을 물은 후 본론을 꺼냈다. “9월 18일 발생한 일본의 군사행동은 학정에 시달리는 만주의 3000만명 주민을 구하고, 일본 거류민의 권익과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부득이한 출병이었다. 관동군은 만주의 영토에 야심이 없다. 성심과 성의를 다해 만주인들의 새로운 국가 건설을 돕고 싶을 뿐이다. 만주는 만주인이 다스려야 한다. 하루빨리 조상의 발상지로 돌아와 새로 탄생할 국가를 이끌어 주기 바란다. 수도는 창춘(長春)으로 할 생각이다.” 푸이는 신중했다. “관동군은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기관이 아니다.” 도이하라의 한마디가 푸이를 안심시켰다. “천황폐하는 관동군을 믿는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푸이가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푸이의 회고록에 실린 두 사람의 대화를 소개한다. “새로운 국가는 어떤 형태의 국가인가?” “선통황제가 주인인 군대를 보유하고 외교권을 갖춘 자주 독립국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공화국인지 제국인지를 알고 싶다.” “그 문제는 선양(瀋陽)에 오면 해결된다.” 푸이는 완강했다. “복벽(復辟)이면 가겠다. 아니면 갈 이유가 없다.” “당연히 제국이다. 아무 문제 없다.” “제국이라면 가겠다.” “16일 전에 만주에 도착할 수 있도록 안배하겠다.” 도이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일본 총영사관에는 비밀로 해라. 외교관들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국제공약 들먹거리며, 일만 복잡하게 만드는 훈수꾼이 대부분이다. 정샤오쉬(鄭孝胥·정효서) 외에는 그 누구와도 의논하지 마라.” 푸이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샤오쉬는 일본 경험이 풍부한 복벽주의자였다.

“머뭇거리면 다른 황족 옹립할 수도”

한적한 소도시 창춘에서 현대화된 도시로 변한 신징의 중앙통. [사진 김명호]

한적한 소도시 창춘에서 현대화된 도시로 변한 신징의 중앙통. [사진 김명호]

11월 6일 상하이의 언론이 푸이와 도이하라의 회담을 보도했다. 베이징에서 달려온 푸이의 사부 첸바오첸(陳寶琛·진보침)이 정샤오쉬를 닦달했다. “지금 반일(反日) 정서가 극에 달했다. 경거망동은 백해무익이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자. 우방의 믿음을 상실하고 민중의 환심을 저버리는 우(愚)를 자초할까 두렵다. 일본 내각의 뜻이라면 몰라도, 일본군 대좌의 말에 현혹된 것이 아닌지 재삼 숙고하기 바란다.” 정이 첸을 진정시켰다. “우리에겐 우방이 없다. 관동군의 만주 침략에 소련은 중립을 선언했다. 미국과 영국도 입을 닫았다. 머뭇거리면 일본 관동군이 다른 황족을 옹립할 가능성이 크다.” 첸은 할 말을 잃었다. 가슴 치며 텐진을 뒤로했다.

푸이를 만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거절하다 보니 보도를 인정하는 꼴이 돼버렸다.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특사를 만났다. 특사는 동북과 일본만 아니면 유럽 어디를 가도 좋으니 희망하는 곳 말하라며 빈정거렸다. 푸이는 냉소했다. “나는 중국을 떠날 계획이 없다. 너는 아직도 대청제국의 구신(舊臣)이다. 일개 군벌의 말을 내게 전하는 것이 가당한지 생각해 봐라.”

푸이의 거처에 선물과 편지가 답지하기 시작했다. 경호원들이 전 동북보안사령부 고문이 보낸 꽃다발에서 소형 폭탄 두 개를 발견했다. 일본 경찰과 일본군 사령부의 조사 결과가 일치했다. “장쉐량의 동북병공창에서 만든 폭탄이다.” 푸이는 일정을 앞당겼다. 도이하라가 지정한 연락관에게 통보했다. “당장 텐진을 떠날 생각이다. 수행원은 정샤오쉬 부자면 족하다.”

11월 10일 새벽, 낡아빠진 승용차 한 대가 텐진의 일본 조계를 빠져나왔다. 트렁크에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짐짝처럼 쭈그리고 있을 줄은 아무도 상상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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