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시대 내가 겪은 남산] 5. 소설가 故 이문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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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 글은 지난 2월 타계한 소설가 이문구씨가 살아있을 때 남긴 글과 자료를 토대로 소설가 김종광씨가 정리한 것입니다.[편집자]

1975년 겨울, 어떤 이들이 느닷없는 시각에 느닷없이 나와서 덮어놓고 가자고 하는데, 저승사자 뺨 쳐먹는다는 남산 사람들 소문을 익히 들었는지라 그냥 따라나설 수밖에. 삼일가도 쯤 가자 겁이 덜컥 나면서 남산의 철대문이 대천 바다만큼 커보이는 것이 과연 저 철대문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아니 날 수가 없었다. 가서 보니' 월간중앙'에 1년 동안 연재한 '오자룡'을 잘 뜯어내어 솜씨도 좋게 한 권의 단행본처럼 가제본까지 해놓았다.

왕조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비교해 간접적으로 반(反)정부적인 비판을 한 대목이 있고 그게 긴급조치 9호에 저촉되었다는 것인데, 그 사람들이 있다면 있는 세상이었으니까 있기는 있을 터이고, 그랬거나 어쨌거나 말끝마다 서로 얽히는 데가 있는 것이 수사에는 통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첫날 저녁 때의 일이었다. 담당 직원이 상관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잠깐 방을 비우는 틈이 생겼다. 나는 그 문제의 가제본을 재빨리 집어다가 넘겨보았다. 보니 군데군데 붉은 줄을 어지러이 그어놓은 중에, 유독 좁쌀만하게 방점을 찍어놓은 글자가 따로 있었다. '박'자였다. 아니, '박'자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씨 가운데서 박씨(朴氏) 성만 찾아 방점을 찍은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수사가 부진했던 까닭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방점이 찍힌 그 박씨 성의 인물이 그 소설에서 가장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진 탓이었다. 그 인물은 또 그들 나름대로 박정희씨를 빗댄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할 수도 있게 된 인물이었다.

나만 당하고 말았으면 원체 개갈 안나는 세상이니께 그러려니 웃어넘겼을 텐데, '오자룡'을 잡지에 실었다고 '월간중앙' 편집주간이던 김석성씨도 뒤따라 들어왔었던 모양이다. 당국이 '오자룡'의 내용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는지 김석성씨가 먼저 풀려나고, 다음날엔 내가 귀가하는 것으로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은 어이없이 마감되었고, '오자룡' 연재는 물론 중단되었다.

후에 '우리동네' 연작을 쓸 때 어차피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이야기일진대, 구태여 이야기마다 딴 제목을 붙이기 위해 가외로 시간을 보낼 까닭도 없었기에, 우리나라에 있는 성씨 가운데 인구가 많은 순서대로 김씨. 이씨.정씨 하고 차례로 성씨를 붙여나갔으나, 박씨는 부득이 건너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오자룡' 때의 기막힌 기억 때문이었다.

한 번 다녀온 남산이라 길이 익어서 그런지 이후로 더러 다녀오게 되었다. 내가 나중에 어떻게 될는지 몰라 매사에 뒷전으로만 배돌며 뒷걸음질치기에나 부지런했던 겁쟁이가, 그놈의 10월 유신이 13월이, 14월이 되어도 서슬이 시퍼렇던 그 징그러운 박씨 유신 시대에 감히 문인들끼리 꾸민 투쟁 단체에 끼여서 별스럽잖은 일거리나마 맡아 한 것뿐이라, 그 시절을 누구 앞에 내세우지도 않았고 또한 스스로 영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더랬다.

하지만 그 투쟁 단체였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의 말석 시절에 누구 말마따나 상머슴꾼 노릇에 일차적으로 충실하다 보니 남산이 그리 멀지 않았다. 여러 사람 남산에 줄줄이 끌려갈 때 나 또한 끌려가 장시간 닦달 받고는 했던 것이다. 남산이라, 남산이라, 그러고 보니 그 남산이라는 데도 내 몸이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걷다가 마주쳤던 한 동네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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