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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달러 넘친다" 독자 개발로 선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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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할린-2 프로젝트 2단계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대우건설 등이 참여해 사할린 최남단 코르사코프항 인근 프리고로드노예 마을에 짓고 있는 액화천연가스(LNG) 생산 공장과 원유 수출 터미널 건설 현장.

"이제 외국이 돈으로 러시아를 놀라게 할 생각은 말라."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만난 콘스탄틴 시모노프 국가에너지안보연구소장은 "외국 기업의 러시아 진출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지적에 이렇게 잘라 말했다. 크렘린의 자원정책 자문에 응해온 그는 "오일달러가 쌓여 있고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며 "자본이 부족해 서방의 투자에 목을 매던 시대는 지났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중동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자원 매장지의 잠재력이 줄어들면서 거대한 미개발 자원을 가진 러시아의 입지는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기세등등한 러시아=모스크바 남쪽에 자리 잡은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의 본사 사옥 앞엔 돈을 빌려주겠다는 외국계 금융 브로커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가스프롬은 올해 4월 기준으로 2440억 달러의 자산가치를 지닌 세계 5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고리 세친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이 이사회 의장으로 있는 국영 석유사 로스네프티는 자원 개발 프로젝트를 같이 하자며 찾아오는 외국 기업인들로 업무가 지장받을 정도라고 한다.

러시아 천연자원부의 세르게이 표도로프 자원정책국장은 "금융 능력, 기술 수준, 전문가 자질 등에서 러시아가 서방에 뒤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러시아 회사들이 독자적으로 자원 개발을 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스프롬은 지난달 초 러시아 서북부 바렌츠해의 슈토크만 가스전 개발을 독자적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애초 노르웨이 스타트오일, 미국 셰브론, 프랑스 토탈 등 2~3개의 외국업체 중 파트너를 선정해 공동 개발하겠다던 계획에서 급선회했다. 개발비가 120억~140억 달러로 예상되는 대형 프로젝트를 러시아가 단독으로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 자원 통제 고삐 바짝 조인다=9월 중순 터진 사할린-2 프로젝트 환경평가 승인 취소 사태에도 자원 통제를 강화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영국계 로열더치셸과 일본 미쓰이.미쓰비시상사 등 외국기업이 단독으로 추진해 오던 이 프로젝트에 가스프롬을 참여시키려는 것이 환경 문제를 제기한 속셈이라는 해석이다. 국영기업을 통해 외국의 자원 독식을 막겠다는 의도다. 마사미 나루세 미쓰이상사 사할린 지사장은 "힘있고 큰 기업의 프로젝트 참여를 환영한다. 가스프롬이 그렇다"며 막후 협상이 진행 중임을 시사했다. 러시아 국가두마(의회)는 올해 말 대규모 매장량을 가진 전략 매장지 개발에 대한 외국 기업의 참여비율을 49% 이하로 제한하는 자원법 개정안을 채택할 예정이다.

◆ 국외로도 진출=자본에 여유가 생기면서 외국 진출에도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시모노프 소장은 "최근 러시아는 외국 기업이 가진 국외 유전이나 판매망 지분과 국내 매장지 지분을 맞교환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이미 아르메니아.몰다비아.우크라이나 등 옛소련권 국가들의 가스 운송망과 판매망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중국의 동시베리아 개발 참여를 허용하는 대가로 중국 내 석유 판매망(주유소) 지분도 확보했다. 한국의 가스판매망과 가스공사 지분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생산은 물론 국제 운송.판매망까지 통제하는 '에너지 제국 러시아'를 건설하려는 푸틴 대통령의 야심 찬 행보다.

◆ 매달리는 외국=이런 가운데 러시아 자원을 확보하려는 외국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 에너지 메이저들을 내세워 러시아에 진출한 미국과 영국.일본은 물론 중국과 인도까지 가세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중국은 러시아에 '올인'하다시피하고 있다. 중국이 러시아 자원 확보에 투자한 돈은 지난해와 올해만 10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모스크바의 한 에너지 전문가는 "중국은 더 많은 투자를 원하지만 러시아가 오히려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꺼리는 실정"이라고 귀띔했다.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나홋카.사할린=유철종 기자

취재 동행 및 자문=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이재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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