줏대 내버린 증시정책/심상복 경제부 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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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요즘 주식시장은 언제 침체가 있었느냐 비웃는 듯 가파른 상승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 열흘남짓 새 주가상승률이 50%를 넘는 종목이 속출하고 있으며 일부 투자자들은 종목을 가릴 겨를도 없이 아무 주식이나 사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상황이 이쯤되자 증시를 진정 아끼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과열을 우려하고 있다. 고병우 증권거래소 이사장도 「과열국면」이라고 진단했다.
이같은 판단에 따라 증권거래소는 23일 오후 주식매입 때 미리 내야 하는 위탁증거금(매입액의 40%)을 모두 현금으로 넣도록 했다. 열기를 다소 진정시키기 위해 외상주식 매입을 부분적으로 자제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현재의 증시상황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면 별다른 규제책이 못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증권거래소는 이같은 규제가 혹 모처럼 불붙은 투자열기에 찬물을 끼얹을 것을 우려해 규제조치보다 훨씬 강도 높은 완화조치도 함께 취했다.
단기간 주가가 급등한 주식을 감리종목으로 지정해 가하던 몇 가지 불이익 중 핵심이 되는 가격등락폭 제한을 풀어 버린 것이다. 예컨대 하루 상한가폭이 1천원인 주식이 감리종목으로 지정될 경우 절반이 5백원밖에 못오르게 했던 것을 감리종목 지정전과 같이 1천원씩 오르도록 허용한다는 얘기다.
거래소측은 이에 대해 가격상승폭 제한이 주가를 왜곡시켜 오히려 상승을 가속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아주 모호한 해명을 붙였다.
그러나 거래소 담당임원도 밝혔듯이 감리종목제도는 과열증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시장조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증권시장관리에 책임을 지고 있는 증권거래소가 이 시점에서 투기심리를 부채질할 소지가 충분히 있는 감리종목제도 변경을 들고 나온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다.
증시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내년 지방의회선거를 앞두고 유입된 정치자금을 「뻥튀기」하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것은 아닌지 하는 루머도 나돌고 있다.
진정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거래소 스스로가 과열이라고 판단해 규제조치를 취하면서 실은 그보다 훨씬 큰 감시의 끈을 풀어버리는 모순되고 줏대없는 증권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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