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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현금 밖에 없는데"...시내버스는 현금 안 받는다면?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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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전문기자의 촉: 현금사용선택권

현금사용선택권을 홍보하는 한국은행 포스터. [출처 한국은행]

현금사용선택권을 홍보하는 한국은행 포스터. [출처 한국은행]

 현재 서울엔 18개 노선, 418대의 시내버스가 '현금 없는 버스'로 시범운영 중입니다. 운전석 옆에 있던 현금수납통을 아예 없애고 교통카드로만 탑승이 가능토록 한 방식인데요.

 지난해 10월 8개 노선, 171대로 시작해 올 1월부터 그 규모를 더 늘렸습니다. 오는 6월까지 시범운영을 한 뒤 확대나 전면 도입 여부 등을 결정한다는 계획인데요.

 애초 현금 없는 버스를 시범 운영하게 된 건 버스업계의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현금 승차 비율이 0.8~0.9% 정도밖에 안 되는데도 현금 정산작업을 위해 한해 투입되는 비용이 20억원에 달하는 등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주장인데요.

 서울에서 하루에 현금을 내고 버스를 타는 승객은 4만명가량 됩니다. 현금을 주로 쓰는 노인이나 취약계층이 많지만, 교통카드를 놓고 왔거나 충전금액이 모자란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동안 현금을 내고 타던 승객들에게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입니다. 서울시는 버스정류소 중 85% 이상이 반경 200m 이내에 교통카드 구입이나 충전이 가능한 편의점 또는 가판대, 지하철역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시내버스에 부착된 현금 없는 버스 안내문. [강갑생 기자]

시내버스에 부착된 현금 없는 버스 안내문. [강갑생 기자]

 그러나 당장 타야 할 버스는 도착했는데 교통카드가 없거나 잔액이 부족한 상황을 알게 되는 경우는 참 난감할 겁니다. 교통카드를 사거나 충전을 위해 이동하는 동안 버스가 기다려줄 리 만무하기 때문인데요.

 평소 운행 간격이 20~30분대로 긴 버스라면 더더욱이나 불편이 클 겁니다. 물론 서울시는 불가피한 경우 버스기사가 승객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기록한 뒤 버스요금을 계좌 이체할 수 있는 안내문을 주는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현금 승차를 위해 이름과 전화번호 같은 개인정보를 넘겨주는 건 좀 과하다는 판단입니다. 게다가 스마트폰 이용 등이 서툰 노인의 경우 계좌 이체를 위해 은행을 찾아가야만 하는 번거로움도 적지 않을 겁니다.

 특히 현금 없는 버스는 2000년대 들어 유럽을 중심으로 등장한 '현금사용선택권'이라는 개념과도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현금사용선택권'은 '현금결제선택권'으로도 불리는데요.

 한국은행에 따르면 '현금사용선택권'은 소비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지급결제수단 선택 시 현금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비자가 결제수단을 선택할 권리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영국과 스웨덴 등에선 2000년대 이후 신용카드와 모바일 결제 등 현금을 대신하는 지급수단 이용이 활성화되면서 취약계층의 금융소외 및 소비활동 제약, 공적 화폐유통시스템 약화 등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했습니다.

교통카드 단말기와 현금수납통이 함께 설치된 버스 내부. [강갑생 기자]

교통카드 단말기와 현금수납통이 함께 설치된 버스 내부. [강갑생 기자]

 이런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현금사용선택권입니다. 현금을 쉽게 찾을 수 있고, 필수적인 서비스에선 현금결제가 가능하도록 보장해주는 내용 등이 포함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선 아직 이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현금을 받지 않는 매장이나 버스가 증가하는 등 유럽과 유사한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2020년 한국은행 발권국의 의뢰로 진행된 '현금결제선택권 보장 입법 추진 국가의 관련 제도 도입 현황 및 시사점'(현정환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연구보고서를 보면 "국내에서 교통ㆍ의료보건과 같은 생활에 필수적인 서비스에서도 현금이 적지 않게 이용됨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 "특히, 교통카드가 널리 보급된 가운데 현금을 교통서비스 이용에 사용하는 비중이 낮지 않은 것은 현금선호도가 높은 계층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실제로 2018년 한국은행의 통계를 보면 교통비가 현금지출 품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7%나 됩니다. 식료품이 53.1%로 가장 많았고, 의료·보건도 5.5%에 달합니다.

현금통을 없앤 '현금 없는 버스'. [강갑생 기자]

현금통을 없앤 '현금 없는 버스'. [강갑생 기자]

 현금 없는 사회 만을 추구하다가 대규모 정전이나 시스템 오류 등으로 인해 카드 결제가 마비되는 사태나 카드 사용에 따른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을 우려하는 시선 역시 적지 않습니다.

 현금사용선택권에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이 때문에 한국은행에서는 현금사용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제작해 보급하고, 관련 홍보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현금이 유일한 지급수단입니다.' 한국은행이 제작한 포스터에 담긴 문구인데요. 여러 이유로 카드나 스마트기기 사용이 어려운 취약계층에겐 그야말로 현금이 유일한 지급수단일 겁니다.

 이들이 시내버스 같은 필수적인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교통카드 사용에 할인 등 혜택을 주는 건 좋지만, 현금을 쓴다고 불이익을 주는 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입니다.

 6월까지 시범운영 뒤 서울시가 현금 없는 버스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반드시 취약계층의 불편을 덜어줄, 현금 사용을 보장해줄 방안부터 먼저 찾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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