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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298.5t 쟁여둔 러시아...'금융핵폭탄'에도 '믿는구석'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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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러 분리주의 공화국인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러 분리주의 공화국인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두둑한 ‘외화 곳간’을 앞세운 러시아의 ‘방패’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경제 제재라는 서방의 ‘창’과 맞붙었다. 러시아는 외화 바구니에 들어있는 달러를 줄이고 그 자리에 금과 위안화를 채워 넣으며 경제적 고립을 견딜 맷집을 키운 상태다. 진지전에 나선 러시아를 겨냥해 미국 등 서방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퇴출이라는 ‘핵폭탄급 제재’를 꺼내 들었다.

서방의 전례 없는 고강도 제재에 금융 고립에 빠진 러시아 경제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가신용등급 하락과 증시 지수 퇴출 등의 여파가 러시아 경제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러시아와 서방의 극단적 대립이 장기화할 경우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경제도 충격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외화 곳간’으로 버티는 러…달러 대신 금·위안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경제 제재란 서방의 창을 막아설 러시아의 방패는 외환보유액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6306억3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중국(3조2502억 달러)과 일본(1조4058억 달러), 스위스(1조1100억 달러), 인도(6336억 달러)에 이어 세계에서 5번째로 크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에 따른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경제 제재의 학습 효과로 ‘외환 곳간’을 두텁게 쌓은 것이다. 당시 경제 제재로 러시아 내 기업과 기관이 보유한 해외 자산이 잇따라 동결되며 돈줄이 말랐다. 전쟁 등을 치르며 러시아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은 8개월 만에 4782억5000만 달러(2014년 6월)에서 3560억 달러(2015년 2월)로 수직 낙하했다.

러시아 외환보유액 추이.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러시아 외환보유액 추이.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곳간의 몸집을 불리며 포트폴리오도 다변화했다. 제재의 칼바람을 견디기 위한 포석이다. 미국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달러 비중을 줄여나간 대시 중국 위안화를 더 담았다. 러시아 외환보유액 중 달러 비중은 41.7%(2018년 1분기)에서 16.4%(2021년 2분기)로 대폭 감소했다. 반대로 위안화 비중은 5%(18년 1분기)에서 13.2%(2021년 2분기)로 크게 확대됐다.

사실 러시아가 믿는 가장 ‘든든한 구석’은 대표적인 안전자산인 금이다. 러시아가 외환보유액 중 금의 비중은 12.2%(2015년 4분기)에서 21.7%(2021년 2분기)로 약 5년 새 두 배 가까이 불어났다. 국제금협회(WGC)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러시아는 2298.5t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

늘어난 규모만 든든한 게 아니다. 뉴욕과 런던 등 주요 금융시장에 묶인 외환보유액과 달리 러시아가 보유한 금은 경제 제재로부터 자유롭다. 뉴욕과 런던 등에 금을 맡긴 주요국과 달리, 러시아 중앙은행은 보유한 금을 모두 자국의 영토 안에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당국은 지난달 28일부터 자국 내 귀금속 시장에서 2년여 만에 금 매입을 재개했다.

박지원 KOTRA 지역연구실 연구위원은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 이후 경제 제재를 겪으면서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을 모두 자국 영토 내에 보관하도록 법을 개정하면서 해외 자산동결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외환보유액 구성.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러시아 외환보유액 구성.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예상 밖의 ‘SWIFT 퇴출’…에너지 기업도 러시아 엑소더스

러시아의 대비에도 서방의 제재안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러시아 주요 은행의 SWIFT 퇴출이라는 ‘핵폭탄급’ 제재를 들고나온 것이다. 국제 무역과 금융결제에 접근할 길이 막힌 데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6303억 달러)의 3분의 2가량인 4000억 달러도 묶이며 돈줄이 말라가고 있다.

SWIFT 퇴출은 양날의 검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대금을 받지 못하게 되지만, 유럽 각국이 러시아에 수출한 물품을 가격을 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 기업 등에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도 어려워진다. 그런 까닭으로 유럽 각국이 이런 피해를 감수하며 러시아를 향해 금융핵폭탄인 SWIFT 제재를 가하기엔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조영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러시아가 경제 제재에 나름대로 대비했어도 전례 없는 강력한 제재를 견뎌내기엔 무리”라며 “특히 자국의 피해를 걱정하며 SWIFT 퇴출 조치를 망설이던 일부 국가가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당초 예상보다 빠르게 제재안이 결정된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28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의 현금인출기(ATM) 앞에 시민들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타스통신

지난 28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의 현금인출기(ATM) 앞에 시민들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타스통신

유럽의 에너지 기업이 ‘탈(脫) 러시아’ 행렬에 동참하는 것도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달 22일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가스관인 ‘노드 스트림 2’에 대한 승인 절차를 중단했다. 영국의 대형 정유회사인 BP와 셸도 지난 28일 러시아의 에너지기업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하거나, 국영 석유회사와의 합작 투자를 철회하기로 했다.

러시아의 경제를 떠받치는 에너지 산업이 흔들리면 당초 예상보다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지난해 러시아 정부 수입에서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5.8%에 달했다.

전방위적인 제재에 러시아가 준비한 ‘방패’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다. 루블화값이 급락하며 ‘뱅크런(대규모 현금인출)’이 본격화하며 달러와 현금은 말라가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러시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9.5%에서 20%로 대폭 인상했다.

이에 더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외 외화 송금을 금지하고, 무역업체들의 외화 수입의 80%를 의무적으로 매각하는 특별 경제조치 대통령령도 발령했다.

박지원 연구위원은 “러시아의 외화 송금 조치는 2015년의 서방 국가의 경제 제재 당시에도 꺼내 들지 않았던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라며 “시장경제를 도입한 러시아가 극단적인 해법을 내놓은 건 그만큼 경제 제재 조치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방과 러시아 치킨게임 시작”

경제 대립이 장기화하면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도 충격을 피해갈 수 없을 전망이다. 조원호 경상대 러시아학과 교수는 “현 상태는 ‘유럽과 러시아 중 누가 먼저 죽느냐’의 치킨 게임이 시작된 것”이라며 “특히 러시아중앙은행의 고금리 통화정책과 외화 송금 금지 등의 조치가 6개월 이상 지속할 경우 경제에 큰 무리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박지원 연구위원은 “러시아가 ‘역(易) 제재’에 나설 가능성까지 생각해야 한다”며 “러시아의 에너지 분야까지 제재가 확대되면 러시아에 의존하는 일부 동유럽 국가의 어려움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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