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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거센 저항…“러시아군 어떤 도시도 장악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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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싸움은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다. 내게 필요한 건 피신이 아니라 실탄이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피신을 제안한 미국 측에 이렇게 답했다고 지난 26일(현지시간) AP통신이 주영 우크라이나 대사관을 인용해 보도했다. 전날 워싱턴포스트(WP)는 미 당국자를 인용해 “미국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탈출을 돕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희생을 각오하고 국민을 결속시키는 지도자로 거듭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젤렌스키는 26일 저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영상에서 “우리의 결속과 용기가 러시아의 점령 시나리오를 깨뜨렸다”며 “세계는 우크라이나인의 강한 모습과 용기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 한 도로가의 파괴된 러시아군 탱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26일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 한 도로가의 파괴된 러시아군 탱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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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는 지난 24일 오전 5시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이래 20여 개의 동영상을 SNS에 올려 전황을 알리면서 각국의 지원을 요청하고, 군과 국민을 이끌고 있다. 페이스북·트위터·인스타그램 등 그의 공식 SNS 팔로어는 1670만 명에 이른다.

이날 오전에는 SNS 영상 메시지에 키예프 대통령 관저를 배경으로 찍은 ‘인증 영상’을 올리면서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조국을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러시아의 제거 표적 1순위라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피신하는 대신 키예프에 남아 전쟁을 이끌고 있음을 국민에게 확인시켰다. 러시아의 역정보 도구로 활용된다는 비판을 받아온 국영 스푸트니크 통신은 전날 하원 대변인을 인용해 “젤렌스키가 이미 폴란드 국경에 가까운 서부 리비우로 도주했으며, 영상은 사전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젤렌스키의 영상에 나온 일행들이 휴대전화를 들어 촬영 날짜와 시간을 확인시켰다.

같은 날 키예프에서 공습경보가 울리자 군인·경찰·시민이 바닥에 황급히 엎드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같은 날 키예프에서 공습경보가 울리자 군인·경찰·시민이 바닥에 황급히 엎드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사실 위기가 고조되던 올해 초까지 젤렌스키는 러시아로부터 협상 상대로 인정받지 못해 서방 국가와 러시아의 담판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러시아군이 침공 이틀 만에 키예프에 접근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친러인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서 협상하자고 제안하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만나자고 역제안하는 등 샅바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양국은 벨라루스 남동부 고멜 지역에서 조건 없이 만나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고 27일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밝혔다.

우크라이나가 거센 저항을 계속하자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무기와 자금 등의 추가 지원에 나섰다. 분쟁 지역에 살상무기를 제공할 수 없다던 독일도 이날 입장을 바꿔 지대공미사일과 대전차 로켓 발사기 등을 공급하기로 했다. 러시아와 협력 관계인 주요 산유국 아제르바이잔도 석유 지원을 약속했다. CNN은 수도에 남아 군과 국민을 독려하는 젤렌스키에 대해 “TV에서 대통령을 연기하는 배우에서 반항적인 전시 지도자가 됐다”고 평가했다.

미 국방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브리핑에서 “(국경에 집결했던) 러시아군의 50% 이상이 침공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한다”며 “상황이 유동적이지만 러시아군이 키예프 외곽 30㎞까지 진출했으며 일부 정찰부대는 키예프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우크라이나의 저항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고 성공적이며, 러시아군이 어떤 도시를 손에 넣었다는 징후는 아직 포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거주 지역과 공공 인프라를 겨냥해 대부분 단거리용인 250발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26일 키예프 관저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26일 키예프 관저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6일 뉴욕타임스(NYT)·월스트리트저널(WSJ)·가디언 등은 우크라이나 국민도 호응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군 당국은 26일 밤 “3만7000여 명이 방위군으로 지원했다”고 발표했다. 징집소마다 전 연령층의 시민이 길게 늘어서 지원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미국 등 외국에서 귀국한 지원병도 있으며, 노인들도 동참하고 있다. 2019년 대선에서 젤렌스키에게 패한 56세의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도 예비군에 지원해 총을 들었다. 국방부가 전날 “화염병을 만들고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국민은 화염병 제조 동영상 인증샷을 SNS에 올리고 있다.

제임스 히피 영국 국방부 차관은 이날 BBC에 “우크라이나는 잔인한 날을 보내고 있지만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미 MSNBC 방송에 “그들(러시아)은 예상보다 훨씬 거센 저항에 부닥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가 물리칠 수 없는 힘을 러시아가 갖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나친 낙관을 경계했다.

침공 나흘째인 27일 인구 140만 명의 우크라이나 제2 도시 하르키우에서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dpa통신과 CNN 등이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동북부 하르키우주의 올레 시네후보프 주지사는 페이스북에 “러시아군의 군용 차량이 도심까지 들어왔지만 수는 많지 않다”고 밝혔다. 오데사·미콜라이프·수미·체르니히우·지토미르 등 우크라이나 남·동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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