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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제재 자체 못 없애자 '성가신 유엔 감시패널' 제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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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러 무기 거래 등을 지적하는 유엔 전문가 패널은 러시아에겐 성가심(annoyance) 그 자체였습니다. 이게 바로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한 진짜 이유입니다."

지난해 5월까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로 활동했던 에릭 펜턴-보크 전 조정관은 지난달 29일 중앙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자국의 제재 회피 행위를 정기적으로 폭로하는 감시 매커니즘을 극도로 싫어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해 8월 서울 중구 통일과나눔에서 열린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NK프로 주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에릭 펜턴-보크 전 조정관이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8월 서울 중구 통일과나눔에서 열린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NK프로 주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에릭 펜턴-보크 전 조정관이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15년 동안 유엔 회원국의 대북 제재 이행 여부를 감시했던 '전문가 패널'의 임기가 오는 30일 종료된다. 매년 관례적으로 채택되던 임기 연장 결의안에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다. 북한과 군사 협력 등을 통해 안보리 결의를 노골적으로 위반해온 러시아는 거부권을 던지면서 "안보리가 반성해야 한다"(바실리 네벤자 주유엔 러시아 대사, 지난달 28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현행범으로 체포되지 않으려 CCTV를 부순 격"(황준국 주유엔 한국 대사, 같은 날)이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영국 외교관 출신의 펜턴-보크 전 조정관은 2021년 5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전문가 패널에서 직접 활동하며 총 4개의 연례 보고서 발간에 참여했다. 그러면서 최근 수년간 패널의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던 러시아와 중국의 행태를 직접 목격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오전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임기를 1년 더 연장하기 위한 결의안 표결을 진행하는 모습. 결국 러시아의 반대로 결의 채택은 부결됐다. 유엔 웹티비 캡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오전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임기를 1년 더 연장하기 위한 결의안 표결을 진행하는 모습. 결국 러시아의 반대로 결의 채택은 부결됐다. 유엔 웹티비 캡처.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해 패널의 임기를 종료시킨 목적은 무엇인가.
러시아가 공개적으로 밝힌 입장은 거부권을 행사한 '진짜 이유'와는 거리가 있다. 결국 북한의 대러 무기 수출, 미사일 확산, 러시아에서 외화벌이를 하는 북한 노동자, 러시아 극동 지역의 북한 정보통신(IT) 노동자 등 문제를 지적한 패널의 활동이 자국 이익에 해를 끼치는 성가신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한때 스스로 찬성했던 제재 체제에 맞서고 있다. 다만 제재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기에 패널이라는 성가신 존재라도 없애버린 셈이다.
러시아는 "전문가 패널이 서방에 동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문가 패널은 싱크탱크, 언론 등으로부터 폭넓게 정보를 수집해 내부 합의를 통해 정확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발표한다. 패널은 모든 출처와 증거에 열려 있었지만, 일부 회원국만이 협조적이었다. 특히 미국, 한국, 일본, 영국 등의 도움이 컸다. 반면 러시아와 중국은 자국민에 의한 제재 회피 행위와 북한의 수법, 이를 돕는 파트너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있었지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기회를 틈타 패널의 활동을 훼방 놓으려고만 했다.  
어떤 방식으로 훼방을 놓았나.
최근 몇 년간 패널이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제재 회피 행위에 대해 문의하면 모두 멸시(contempt) 당하거나 무시됐다. 최근 패널 보고서를 주의 깊게 읽은 이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패널 보고서가 서방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수집한 정보를 반영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고의적인 왜곡이나 서방에 동조한 결과가 아니다. 러시아와 중국도 패널을 도울 기회가 매년 있었지만 스스로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제재를 위반하는 게 자국에 더 이롭다고 판단한 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만난 모습. 스푸트니크. AP.중앙DB.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만난 모습. 스푸트니크. AP.중앙DB.

전문가 패널의 임기가 실제 종료되는 오는 30일 전까지 결과를 뒤집을 가능성은.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1718 위원회)가 할 수 있는 조치는 사실상 전무하다. 러시아는 임기 연장 결의안에 거부권을 활용했듯 패널 부활 시도에도 거부권을 쓸 것이다. 애석하지만 패널은 이미 사망한 셈이다.
'뜻을 함께 하는 동맹·우호국'이 모니터링 기능을 하는 일종의 '자문 기구'를 만들어 공백을 메울 수 있을까.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다. 유엔과 별개의 공간에서 패널의 기존 기능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여러 글로벌 싱크탱크와 언론사들이 독립적으로 증거를 수집·분석·발표하는 등 패널과 유사한 업무를 하고 있다. 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패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던 공정성과 독립성이라는 원칙을 유지하는 것이다.
패널의 활동이 이어지는 게 왜 중요한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속도를 늦추는 데에 실질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패널의 권고를 통해 제재 위반 수법에 대한 회원국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고, 세관과 수출 통제 매커니즘도 개선됐다. '북한이 이미 WMD를 많이 개발했기 때문에 제재와 패널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명백한 사실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다. 제재는 제대로 이행돼야만 의미가 있다. 북한의 가장 긴밀한 교역 상대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제재를 수년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이 WMD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황준국 주유엔 한국 대사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오전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임기를 1년 더 연장하기 위한 결의안 채택이 러시아의 반대로 부결된 뒤 발언하는 모습. 유엔 웹티비 캡처.

황준국 주유엔 한국 대사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오전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의 임기를 1년 더 연장하기 위한 결의안 채택이 러시아의 반대로 부결된 뒤 발언하는 모습. 유엔 웹티비 캡처.

한국이 올해부터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한국보다 북한을 더 잘 이해하는 국가는 없다. 한국의 시각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또한 유엔 안보리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한국의 잘못이 아니다. 2차 대전의 참상 뒤 만들어진 유엔의 규칙은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유엔이 왜, 어떤 상황에서 창설됐는지 잊어버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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