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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낭당 비슷한 전통적 신앙 대상|오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몽골에는 우리나라의 서낭당과 똑 같은 오보가 민간에서 현재도 잘 전승되고 있다.
오보조사에는 한계가 있었다. 안내자에게 오보가 있는 곳을 좀 가 보자고 했더니『그런 미신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의 대답 속에는 의지가 잠재해 있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한계성이 있었다. 자유주의 하에서 생활하고 사고하는 사람들이 사회주의 하에 들어가 절감하는 현지의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수도 울란바토르에 일주일동안 체류하면서 동남방 80km지점의 텔레지(TERL)와 서쪽의 말첸스 마을에 간 일이 있었다.
울란바토르 시에시 텔레지를 향해서 10km쯤 가는데 길옆의 언덕 위에 오보가 있어 차를 세워 조사했다. 높이 1m정도 자연 루 석 단으로 중앙에 막대기를 꽂고 그 위에 여러 개의 헝겊이 매달려 있었다. 제의 때에 새 오색 표를 달았겠으나 오래되어 퇴색돼 있었다. 텔레지에 가는 도중 다시 세 곳에서 오보를 보았으나 거의 같은 양상이었다.

<돌 놓고 주위 돌아>
한 곳의 오보에는 돌 이외에 말과 양의 뼈, 쇠파이프와 나무 조각까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근래의 도로공사 때 쓰다 버린 물건을 가져다 놓은 것으로 추측되어 오보에 대한 의식도 변해 가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말첸스 마을로 가는 길에는 더 많은 오보가 있었다. 아이스마을의 언덕에는 길 좌우에 오보가 있었고 얕은 산 위에도 오보가 보여 모두 5개의 오보가 약 5백m의 선상에 있었다. 높이가 낮은 것은 1m에서 높은 것은 3m나 되는 크고 작은 오보들이 있었는데 인근 초원에 소·말·양이 풀을 뜯고 연기가 나는 겔(포·천막집)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초원에 모여든 유목민들은 오보를 이제 도로표시가 아닌 마을을 지켜 주고, 가족을 지켜 주고, 가축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으로서의 신앙적 기능을 지닌 전통적 신앙대상으로 정착시켰다.
일행이 초원의 겔을 찾아 사진을 찍으러 간 사이에 나는 몽골인 안내자와 운전사 가차에서 내려 돌을 집더니 오보에 가서 돌을 올려놓고 오보를 우로 한바퀴 모는 경건한 동작을 보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오보에 가서도 같은 동작을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국으로 지구상에 군림했던 몽골 족의 그 힘과 지혜와 믿음이 오보와도 관련되는 것 같았다. 문화가 있고 전통이 유지되고 긍지를 가진 민족은 영광이 있는 깃인데 몽골 인들이 지금은 열세해 있으나 언젠가는 다시 영광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 표지에서 출발해 수호신으로 정착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을 것이며 지금에 있어서는 신앙 석 있는 오보로 전승되어 현존한다.

<최대규모 적석단>
오보의 제사는 5월5일, 7월13일 수확기 대상들이 통과할 때마다, 또는 마을에 새 오보가 생겼을 때 수시로 제사하는 등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l906년에 몽골을 답사한 도리이류쇼 부인의 기록에는 5윌 단오와 7월13일로 기록되어 있다.
오보는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아 돌무덤처럼 자연스럽게 쌓여 있는 것, 즉 우리의 서낭당처럼 생긴 것이 원래의 것이지만 신앙심이 두터워지고 많은 사람의 수호신으로 추앙됨이 떠라, 사람의 힘을 보태서 정성껏 적석단으로 된 큰 규모의 오보도 있다. 도리이류쇼는 왕부 앞에 대소 13개의 오보가 있고 직 석으로 되어 있다고 했으며, 열하 지방에도 낙타 키의 3배나 되는 큰 적석단 오보 기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티베트에도 높이 6m, 폭 4m나 되는 적석단의 거대한 오보가 있는 깃으로 소개된바 있는데 이는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왕단과 비교되는 오보다.
덴마크 사람 하스룬드는 1927년부터 3년 동안 중국의 장 가구에서 시작하여 실크로드를 거쳐 소련의 카자카스 지방으로 빠지는 남쪽 몽골을 답사한 여행기에서 오보에 관해 언급했다.

<대상들의 길잡이>
오보 제사는 동제처럼 마을집단으로 거행되는데 라마승려에 의해 집행되는 것이 보통이고 제사 지낸 다음 양고기 요리 등 제물로 음복을 하고 오 신의 출제가 멀어진다. 이때 필수의 경기는 활 소기·말타기·씨름으로 되어 있다.
몽골에 있어 오보는 문화적·지리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서 발행된 1건6백만 분의1 몽골지도에도 파언악박가 주천과 난 주로 통한 갈림길에 표시되어 있고 고비 사막에서 북상해 시베리아로 통하는 흑룡강의 상류길목에도 오보가 표시되어 있다. 몽골 정부에서 발행된 2백50만 분의l 지도에도 만다즈 오보, 사이한 오보, 쓰아갈 오보 등 이 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시도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서낭당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대관령 서낭당·문경새재 서낭당 같이 이름난 서낭당이 있지만 1만 분의 1지도나 공공 간행지도에 전혀 표시되는 일이 없다.
중국이나 몽골에서는 오보가 표시되는 것은 그만큼 중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에 표시된 오보 등은 고대로부터 사람과 가족이 이동하고 교역하고 여행하던 큰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우리국토의 4배쯤 되는 광막한 고비사막은 사람이 살수 없는 황무지고 비가 내리지 않아 초목이 자라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기 위해 고비 사막을 횡단해야 했으니 광막한 곳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언덕 위에 돌을 쌓아「표시 물」로 삼았고 그래도 모자라기를 세우고 더 잘 식별되게 하기 위해 기폭으로 헝겊을 매달아 바람에 펄럭이게 한 것이 오보의 시 원이다. 초기의 오보는 도로표지의 기능을 지니고 있어 큰 길목, 즉 대상과 여행자·유목민들이 이동하는 길목에는 이름난 오보가 있게 되고 지도상에도 표시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오보는 몽골의 문화 생활과 지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기에 오색 천 달아>
울란바토르 국립 박물관의 책임자 말에 의하면 지금 몽골 안에는 이름난 오보만도 4천여 개나 있고, 그밖에 또 소멸되고 새로 만들어지는 수많은 오보들이 있어 그 실태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몽골이 1921년 소련에 의해 사회주의화 된 후 70년 동안 유물사관에 의해 철저한만큼 전통문화가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곳곳에 오보가 유지되고 있고 새로 만들어지는 끈질긴 보수의 일단을 볼 수가 있어 몽골인들의 심성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오보가 우리의 서낭당과 유사한 점으로는 ▲언덕 위 산 위 고갯길 또는 마음과 마을을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고 ▲돌을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누석단 또는 정성껏 쌓은 적석단으로 되어 있으며 ▲경계표·도로표지도 되거니와 수호신으로 사람과 가축을 지키고 행인의 안전도 보호하는 복합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오보에서 제물을 차리고 기를 세우고 오색 표를 걸고 소원을 빌며 제사 지낸 다음 오 신으로 노래와 춤과 경기로 놀이문화를 전개하고 축제를 벌이는 점 등도 우리와 같다.
이같은 사실은 오보와 서낭당이 형태상으로 유사할 뿐 아니라 그 기능에 있어 동류의 것으로 우리 서낭당의 원류를 살피는데 해답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고, 기는 솟대와도 관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글=임동권 교수(중앙대·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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