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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자연과 지구에 다정한 후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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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6호 31면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집안에 화분 몇 개 없는 집이 있을까. 여름이면 정원 숲에 둘러싸여 그늘로 변하고, 겨울에야 따스한 햇볕이 드는 아파트 2층 우리 집에도 행운목, 알로에, 산세비에리아, 난초 등을 심은 화분 십여 개가 있고, 부엌 창틀에는 작은 선인장 화분도 놓여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집안 생활이 잦아지면서 벗 삼아 함께 사는 반려 식물이 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식물에 물을 주면서 가만히 생각한다.

인간은 사회적이다. 이 말은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인간과 공기 사이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지난 두 해 동안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식물도, 동물도, 바위도, 지구도, 태양도 인간과 함께 공생하는 사회를 이룬다. 이들을 무시하고, ‘사이’를 인간으로 좁혀서 사고하는 근대 서양의 사고가 오늘날 인류를 파멸 위기로 몰아넣었다.

식물·동물·바위·지구·태양 등
비인간 행위자 무시해 인류 위기
반려 동물·식물 ‘집사’된 마음으로
정치하는 후보에게 투표했으면

근대 정치사상의 출발점에 놓여 있는 토머스 홉스의 사고 실험에서 인간은 어둠 속에 나 홀로 서 있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말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사회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나쁘게는 끊임없는 공포와 폭력적 죽음의 위험이 있어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

선데이 칼럼 2/19

선데이 칼럼 2/19

홉스의 인류 물리학에서 사람은 원자처럼 존재한다. 우정도 없고, 사랑도 없고, 평화도 없고, 조화도 없고, 돌봄도 없다. 잔혹한 마음을 품은 채 마주치면 서로 적대하며 주먹을 쓰는 폭력배이자 살해자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문명(정치)이란, 폭력을 중단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위대한 결단, 즉 절대권력(리바이어던)에 대한 복종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다.

멋진 설명이지만 실제 자연과 비슷하지도 않다. 어떤 존재도 ‘홀로’ 있지 않다. 고독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인류의 역사 내내 인간은 혼자 있어도 절대로 외롭지 않았다. 마음속에선 언제나 신의 목소리가 울렸고, 조상의 영혼이 말을 붙였으며, 나무와 동물이 주시하고 바람이 속삭였다. 인간은 벌거벗은 채 포식자 앞에 온전히 노출된 적이 드물었다. 수풀이 가리고, 바위가 숨기고, 나무가 감추어 주었다. 우리 곁에는 가족이나 친족이 있었다. 항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자연은 우리에게 자주 안식처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들 공동체 안에서 스무 해 가까이 돌봄을 받으며 ‘함께 삶’을 익힌다. 덕분에 인간처럼 표정이 풍부하고, 인간처럼 언어가 발달하고, 인간처럼 눈치 빠른 생명체는 없는 듯하다. 세라 블레퍼 허디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인간은 협동 번식과 돌봄 공유를 통해 상호 이해를 진화시켰다. 인간의 사회성은 사후적이지 않고 생득적이다. 인간은 이타성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는 타인과 불화하고 경쟁하고 투쟁할 때보다 타인을 돕고 사랑과 우정을 나눌 때 더욱더 깊은 만족을 느낀다.

인류의 역사는 우애를 느끼고 기쁨을 함께 나눌 내집단을 서서히 늘려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가족에서 친족으로, 친족에서 부족, 도시, 제국, 인류 등으로,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집단은 점차 넓어져 왔다.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배신하고, 때때로 잔혹한 짓을 하고, 어리석게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 각자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가 있고, 똑같이 우애의 대상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드물다. 종교나 성별이나 피부색이 다르다고, 지위가 낮거나 재산이 없다고 타인을 차별하고 패악을 저지르는, 덜떨어진 이들을 우리는 수치로 생각한다. 이들은 우리 본성에 내재한 다정함의 배신자들이다.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들이면 그에 맞춰 삶이 달라지듯, 나무나 꽃이 집 안에 들어서면 인간은 서서히 ‘식물 집사’로 변신한다. 상태를 살펴 정기적으로 물도 주고 영양제도 심는 등 돌봄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검색해 지식을 쌓고, 커뮤니티에 가입해 친분도 맺고, 책 사서 공부하는 등 사회적 행위와 인간관계도 변화한다. 혹여 반려 식물에 문제 생길까 싶어 여행도 길게 못 한다.

인간이 자연을 바꾸는 만큼, 자연도 인간을 바꾼다. 철학자 조르주 라투르의 표현을 빌리면, ‘비인간 행위자’ 역시 ‘인간 행위자’와 네트워크로 엮여 있고, 역동적 상호작용을 영원히 지속한다. 새삼스럽지는 않다. 본래 그러한 것인데,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요즈음 동물이나 식물을 대하는 반려인들 태도를 보면, 인류는 내집단을 인간 너머까지 확장하는 여정에 들어선 듯하다. 반려 생물을 한 가족처럼 여기면서 아빠, 엄마, 오빠, 언니 등 관계 호칭을 부여해 완연히 사람처럼 대접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식물을 포함하고, 지구 전체로 퍼져 갈 가망성이 작지 않다. 기후 재앙과 함께 선명해진 지속가능성 위기는 인류에게 다정함의 내집단을 확장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 정치와 비인간 정치를 함께 생각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인간 행복이 지구의 불행이 되는 역사는 멈출 때가 되었다. 요즈음 인간 권력자를 선거한다. 나를 통해서 동물도, 식물도, 강물도, 산야도, 공기도 행위자로 인간 정치에 참여한다. 자연을 반려 삼아 함께 투표하면 인간과 지구는 더 오랫동안 공생할 수 있다. 다들 ‘집사’의 마음으로 자연과 지구에 다정한 후보에게 투표했으면 좋겠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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