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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바흐에 가렸던 천재 아들들이 부활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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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우리에게 익숙한 J.S.바흐. [사진 각 음반사]

우리에게 익숙한 J.S.바흐. [사진 각 음반사]

연주자들이 바흐에 빠졌다. 그러나 잠깐, 그 바흐가 아니다. 서양 음악의 기틀을 세운 작곡가는 J.S.바흐, 즉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이고, 가장 유명한 바흐다. 그런데 그의 가문은 독일 중부에서 200년 동안 음악의 제왕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바흐’의 위와 아래 세대로 음악가 바흐가 50명쯤 더 있다.

최근 연주자들이 그 ‘나머지 바흐’를 조명하고 있다. 우선 기교는 화려하고 곡목 선정은 과감한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이 지난달 J.S.바흐의 둘째 아들인 C.P.E. 바흐의 곡으로 음반을 냈다. 음반사 하이페리온이 발매해 영국의 음반 잡지 그라모폰이 이달의 앨범으로 꼽았다. 또 최근 세계 무대에서 몸값 높은 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가 바흐의 아들들에 주목했다. 지난해 10월 낸 그의 음반은 J.S.바흐의 작품과 아들 네 명의 작품을 함께 연주해 수록했다.

피아니스트 미하엘 리스케는 현대적인 표지로 C.P.E.바흐의 특성을 표현했다. [사진 각 음반사]

피아니스트 미하엘 리스케는 현대적인 표지로 C.P.E.바흐의 특성을 표현했다. [사진 각 음반사]

한국에서도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대 교수인 첼리스트 김민지는 지난해 12월 C.P.E.바흐의 협주곡 전곡(3곡)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했다. 또 조성현(플루트)과 함경(오보에)이 새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 J.S.바흐, 두 아들이 작곡한 총 세 곡을 담은 앨범을 올 상반기 낼 예정이다.

도대체 음악가 바흐가 몇 명이었기에 ‘바흐 아들’ 조명이 이렇게 이어질 수 있을까. 그 가계도를 정리해볼 차례다. 바흐는 첫째 부인과 1720년 사별하고 1년 후 재혼했다. 첫 결혼에서 아이 7명, 두 번째에 13명을 낳았는데 그중 10명이 어려서 사망했다. 아들과 딸에게 고루 음악을 가르쳤고, 유명한 음악가가 된 아들이 4명이다.

다닐 트리포노프는 아들 바흐 네 명의 음악을 한 음반에 담았다. [사진 각 음반사]

다닐 트리포노프는 아들 바흐 네 명의 음악을 한 음반에 담았다. [사진 각 음반사]

차례로 빌헬름 프리드만(W.F., 1710~84),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C.P.E., 1714~88),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J.C.F., 1732~95), 요한 크리스토프(J.C., 1735~82)다. 후손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하지만, J.S.바흐 자체가 8형제 중 막내다. 형제들도 대부분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였다. 게다가 J.S.바흐만 해도 작품을 1000곡 이상 남겼다.

‘아들 바흐’들의 음악은 아버지에게 가리기엔 아깝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아믈랭의 C.P.E.바흐 음반을 소개하면서 “19세기에는 아버지보다 유명했지만, 당연히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그 이유를 양식의 변화에서 찾았다. 아버지 J.S.바흐가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한가운데 위치하면서 양식을 확립한 이라는 명성을 누리게 된 데 비해 아들들은 바로크 이후의 고전·낭만까지 넘어가는 변화의 시대에 있었다. 따라서 후대가 그들을 이해할 명확한 카테고리를 찾지 못했다. 뉴욕타임스 평론가 데이비드 앨런은 C.P.E.바흐의 음악을 “놀랍고, 불안정하며, 실험적”이라고 평했다.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이 C.P.E.바흐를 녹음한 최근 음반이 주목받고 있다. [사진 각 음반사]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이 C.P.E.바흐를 녹음한 최근 음반이 주목받고 있다. [사진 각 음반사]

C.P.E.바흐의 음악은 그나마 음악가들에게 낯설지 않은 편이다. 그는 다양한 편성의 작품을 900여곡 남겼고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2001년), 미하엘 리스케(2019년) 등이 주목할만한 음반을 내놨다. C.P.E.바흐의 소나타와 론도 앨범을 낸 아믈랭은 음반 책자에서 “놀랄만한 위트와 천재성에서 18세기의 하이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평했다.

J.S.바흐의 아들인 W.F., C.P.E.바흐의 작품을 함께 녹음한 조성현(오른쪽·플루트)과 함경(오보에). [사진 안웅철 작가]

J.S.바흐의 아들인 W.F., C.P.E.바흐의 작품을 함께 녹음한 조성현(오른쪽·플루트)과 함경(오보에). [사진 안웅철 작가]

바흐 아들 4명의 음악을 한 음반에 녹음한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는 이들의 영향을 더 넓고 깊게 평가한다. 트리포노프는 음반 내지에서 “모차르트·베토벤·쇼팽·로시니까지 이들의 영향이 있다”고 했다. 아들 음악가 6명 중 막내인 J.C.바흐는 모차르트에 깊은 영향을 줬다. 둘째 C.P.E.바흐의 음악은 베토벤의 혁신적인 음악과 연결된다. 트리포노프는 “첫째 W.F.의 음악은 쇼팽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고, 다섯 번째인 J.C.F.바흐의 음악은 즐거움이라는 측면에서 로시니의 음악을 예견한다”고 했다.

플루티스트 조성현은 그중에서도 W.F.바흐의 음악에 주목했다. 조성현은 W.F.바흐가 두 대의 플루트를 위해 작곡한 6곡을 플루트·오보에 조합으로 바꿔 녹음했다. 그는 “이 작품의 녹음 자체가 거의 없었다”며 “꼭 음반으로 남기고 싶어 오래전부터 구상했고 2018년 녹음을 끝냈다”고 설명했다.

거대한 바흐 가문을 조명하는 연주자들은 결국 그 안에서 인간과 사랑을 발견한다. 트리포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J.S.) 바흐를 평생 음악에 봉사한 심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헌신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아마도 바흐 가문은 활기 넘치고, 사랑과 음악이 가득한 집이었으리라.” 수많은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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