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과 북 「낡은 보호본능」 버려야/장두성(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또 한번 합의없이 끝난 남북 총리회담 결과를 보면서 이런 식으로 가도 앞으로 10년 뒤 쯤에는 한반도가 분단 이전 상태와 같은 온전한 모습으로 통일이 되어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할 일 없는 사람의 한가한 상상의 유희가 아니다.
세계가 변하고 있는 속도와 방향을 볼때 그때쯤이면 한반도가 하나됐건 둘로 갈라져 있건간에 상관없이 우리 민족의 진운을 조건지우는 주변 정세는 질적 변화를 끝내고 압박을 가해 올 것이 틀림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남북이 스스로에게 엄격히 일깨워야 할 점은 우리만 빼놓고는 냉전은 이제 세계에서 말끔히 청산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미국과 소련 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천안문 사태를 겪은 중국도 공산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부 분열없이 개혁과 개방을 추진해 나가려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과거 이념과 무기를 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리던 주변 국가들의 관계는 각자의 경제력을 키우기 위한 이합집산을 벌여 나갈 것이 틀림없다. 그 사이에서 한반도가 또다시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멀리잡아도 10년 뒤에는 수천년을 이어온 역사ㆍ운명공동체로 이땅과 국민이 반드시 복원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우리 민족단위의 생존문제다. 이산가족들의 상봉도 좋고 금강산 관광도 좋다. 그러나 10년 후의 주변 정세를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한갓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친 중국 결 일본 연 미방」을 주창했던 구한말시대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나오도록 만들었던 시대상황이 1세기를 사이에 두고 재연되고 있지만 우리의 분단된 지금 위상은 오히려 그때 보다도 못한 실정이 아닌가. 또다시 힘센 자에게 할퀴고 짓밟히지 않도록 우리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통일이 그때쯤은 되어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미래상을 설정해 놓고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으로 통일과업에 따르는 현실문제에 임해야만 쌍방 당국이나 국민은 지금도 남아 있는 냉전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거시적 눈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현상으로서는 냉전시대의 필요에 따라 미국이 한국에 그나마 보여줬던 안보관련의 배려가 걷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도 변하고 중국도 변하고 소련도 변하고 있다. 한소 수교를 위해 소련이 북한과의 오랜 맹방관계를 끊고 있는 것을 우리 좋을대로만 해석하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자국의 경제적 실리를 위해서는 소련뿐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들도 과거의 친소관계를 간단히 뒤바꿀 수 있게 된 새로운 국제관계의 룰을 우리는 직시해야 된다.
이제 남한이건 북한이건간에 냉전시대에 기댔던 언덕은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소 수교 발표 직후 김일성 주석이 북경과의 접촉에서 지원을 명확히 얻어내지 못한 것도 중국조차 더 이상 북한이 기댈 언덕은 될 수 없음을 입증했다.
남한도 마찬가지다. 오랜 통상마찰과 우루과이 라운드의 압력은 한미 관계가 질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일본도 더 이상 한국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북한과 급속한 접근을 하고 있다. 냉전시대에 우리가 동류의식을 가졌던 「서방세계」는 이제 친구이기 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경쟁상대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블록화현상은 비대해진 유럽의 등장을 촉매로 해서 곳곳에 연쇄반응을 일으킬 것이 명백하다. 내년 고르바초프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일본의 시베리아 진출은 본격화될 전망이다. 미일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중국의 방대한 인력과 일본의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밀착해서 거대한 경제단위를 형성하는 사태는 시간문제다.
이런 판에 한반도만 냉전의 케케묵은 틀속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남한 따로 북한 따로 끼어들어봐야 결과는 처음부터 뻔한 노릇이다. 경쟁에 지는 것은 물론 곳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거대한 경제블록에 꼼짝없이 종속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결과는 결국 형태만 달랐지 실에 있어서는 서세동점의 대세속에서 쇄국을 척아와 위정으로 착각했다가 결국 제국주의 침략에 완전 무방비상태로 나라를 방치했던 구한말과 다를 게 없다.
이번에 두번째로 열린 남북 총리회담의 앞날을 보는 우리 민족 모두의 시각은 그런 우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역사의식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구체적 표상은 냉전의식 구조로부터 벗어나 서로에게서 기댈 언덕을 찾는 길 뿐이다.
그러기 위해 남과 북은 옹색한 자기보호 본능에서 탈피해 남북관계를 대결의 악순환 아닌 화합의 선순환으로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북은 대남 교류와 대내 개혁으로 외부보다는 한반도 내부의 결속에서 난국타개의 길을 찾아야 될 것이고 남도 하루빨리 냉전시대의 경직된 자기보호 장치들을 개혁함으로써 역시 북에 접근해 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될 것이다.
10년 후의 한반도는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는 미래상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지침이 될때 남북관계의 앞날을 흐리게 하는 미시적 장애물들은 보다 쉽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논설주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