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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나의 인생을 열어준 어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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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시집, 그까짓 시집 뭣하러 갈 것이냐? 다른 길이 있는 것을 모르면 여자로 태어나서 시집을 안 갈 도리가 없지만,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무엇하러 시집을 갈 것이냐? 너는 커서 꼭 원불교 교무가 되어라, 기왕이면 한평생 많은 사람을 위해 살고 큰 살림 해라.

어머니가 내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신 말씀이다. 남원읍내가 아주 먼 도시라고 여기면서 산골마을에서 자라던 나는 이 세상에서 교무님이 가장 훌륭하고 제일 높으신 분인 줄로만 알았다. 교당은 언제 가보아도 청결했다. 그리고 교무님은 항상 깨끗한 옷만 입고 많은 사람이 우러러 모시는 것 같았다.  또 그분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인자해서 마치 선녀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도 그분처럼 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내 인생은 이미 축복받고 있는 듯했고 희망찬 앞길이 훤히 열려 있는 것 같았다.

“뭐하러 시집 가냐” 어릴적 말씀
열아홉 살에 지원한 원불교 교무
‘더 값진 일, 더 큰 일’ 다짐 지켜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지만 우리 박씨 가문에서는 원불교 정녀가 30여 명이나 나왔다. 그때 우리 마을에서 좀 출중해 보이는 처녀들은 하나하나 원불교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의 가장 큰 꿈은 교무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네가 만약 교무만 된다면 이 어미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너를 끝까지 가르칠 테다, 대학까지라도”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곧 실행이 되었다. 어머니는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남원 수지산골 마을에서 전북여중과 전주여고를 보내셨다. 그 당시 남원군에서 전북여중을 다니는 사람은 일곱 명뿐이었다.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은 대학생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대학교까지 갈 사람? 했을 때 나 혼자서만 손을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큰 자긍심을 갖도록 키우셨다. 나는 아무 방황 없이 어머니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잠시 외가댁을 다녀와서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랫목에 기장이 긴 검정 치마가 걸려 있었다. 그 검정 치마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엄숙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검정 치마는 원불교 정녀가 되고 교무가 되기 위해 내가 입어야 하는 옷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원불교 총부에서 널 오라는 전갈이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큰 소원이라도 방금 성취하신 분처럼 마냥 행복해 보이셨다. 내 나이 열아홉, 어머니 서른여덟 살 때의 일이다. 옷을 담을 가방도 없던 그 시절, 어머니는 고리짝에다 짐을 챙기시면서 부정이라도 탈세라 유난히 조심스러워하셨다. 그리고 앞으로 남다른 나의 삶에 대한 당부의 말씀이 참 많으셨다. 나의 어린 뜻이 자라 이제 원불교로 옮겨 심어지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만들어놓으신 그 치마를 보면서, 나는 더 값진 일, 더 큰 일,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살기 위해 저 옷을 입고 교무가 되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큰 다짐을 했다. 교무가 되는 길, 그 소망과 희망이 드디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왠지 모를 긴장감이 나 자신을 휩싸고 있었다. 아직 잘 모르긴 해도 수도자의 길, 그 인고의 세월에 대한 부담감에다 어머니의 많은 당부의 말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예정되었던 출가인데도 새삼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그동안 가까웠던 모든 인연에 마치 영원한 작별을 고하듯 편지를 썼다. 물론 나의 주소는 비어 있었다. 그것은 쌓은 관계의 정리였고 단절의 예고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여일 만에 세속의 삶과 결별하고 원불교의 정녀가 되고 교무가 되기 위해 발등까지 치렁거리는 검정 치마를 입고, 아직 봄바람이 차갑던 봄날 어머니랑 함께 남원 기차역까지 걸어갔다. 나는 어머니의 경건한 배웅을 받으며 출가의 길을 떠났다.

출가 후 3년 동안 원불교 총부에서 위로 어른들을 모시고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며 모든 수도자의 범절을 몸에 익혔다. 그때 나의 소임 중에는 새벽 5시 기상종과 밤 10시 취침종을 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종을 치지 못했다. 그래서 총부 대중이 아침 좌선을 못 하는 큰 사건이 벌어졌다. 어른들께서는 방마다 찾아다니며 사죄를 드리라고 했다. 특히 남자분들 처소까지 찾아다니며 문밖에서 “아침종을 못 쳐 죄송합니다”라고 사죄의 말씀을 드릴 때는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익산 시내도 내 마음대로 나갈 수 없던 그 시절, 익산 시내에서 상영 중인 ‘로마의 휴일’ 그 영화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TV에서 ‘로마의 휴일’ 그 영화를 보았다. 실로 60여년보다 더 긴 세월이 흐르고 나서였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나의 출가 새내기 시절 내 모습도 회상의 창을 통해 함께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