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사의여행스케치] 르코르뷔지에 '사부아 주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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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의 답사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물론 관광과 답사의 경계는 불명확할뿐더러 구분해야 하는 개념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름의 지식으로 무장하고 여행안내서엔 나오지 않는 뭔가를 찾아나서는 길은 분명 파리의 에펠탑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흥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인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건물들을 보러 가는 길도 그랬다. 파리 서쪽 푸아시는 수도권 전철 격인 RER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가야 하는 작은 도시다. 수많은 관광객을 뒤로 하고 파리를 벗어났다. 푸아시에는 르코르뷔지에가 1929년에 설계한 대표작 사부아 주택이 있다. 이를 기원 삼아 세계 각지에 비로소 콘크리트와 유리로 된 상자형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사부아 주택은 푸아시 역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50번 버스를 타고 집 앞까지 갔다. 이 작은 도시를 찾는 외국인들의 거의 유일한 목적지인 때문인지, 청소부 아저씨는 뭘 물을 듯 다가오는 동양인을 보자마자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야, 저기" 하고 알려 주셨다.

대문을 지나 정원에 들어섰다. 상자 모양의 새하얀 집은 르코르뷔지에가 주창한 근대 건축의 5원칙, 그러니까 '필로티(건물 전체 또는 일부를 기둥으로 들어올려 지상에서 분리한 것)''자유로운 평면''옥상정원''가로로 긴 창''자유로운 입면' 등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집 안은 특별한 시설 없이 집 자체를 보여 주는 전시 공간이었다. 기하학적인 외부 모습과는 달리 내부 동선은 자유롭게 얽혀 있었다. 각국에서 온 건축 순례자들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건축적 산책'을 하고 있었다.

문득 '한국의 아파트들은 이 집의 손자뻘쯤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르코르뷔지에는 "새로운 시대의 주택이란 살기 위한 기계"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능성만을 추구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직접 본 사부아 주택에는 분명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선이 살아 있었다.

오영욱 일러스트레이터.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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