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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유럽 긴축에도 돈 푸는 일본…엔화가치 4년8개월만 최저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6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 증시와 엔화 환율이 표시된 전광판 앞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6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 증시와 엔화 환율이 표시된 전광판 앞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일본 엔화값이 4년 8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며 미국과 유럽·한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이 돈줄을 죄며 매(통화 긴축)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일본만 여전히 비둘기(통화완화 선호)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어서다.

17일 일본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가치는 달러당 114.89엔에 마감했다. 장중엔 114.97엔까지 떨어지며 엔화가치는 2017년 3월 14일 이후 가장 낮았다(환율 상승). 블룸버그 통신은 “미국의 소매 판매·산업생산 지표가 호조를 보이며 달러화가 강세를 이어가고 미국 국채수익률(금리)이 오르며 엔화 가치의 하락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4년 8개월만에 가장 낮아진 엔화가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4년 8개월만에 가장 낮아진 엔화가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엔저 현상은 올해 들어 본격화하고 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지난 1월과 비교해 10%가량 하락했다. 주요 10개국(G10) 통화 중 최약세다. 일본 다이와증권의 이시즈키 유키오 선임 환율전략가는 블룸버그에 “엔화가치가 (심리적 저항선인) 달러당 115엔까지 이르면 달러 투자 수요 급증으로 엔화 가치 하락은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유럽 등 주요국과 반대로 가는 통화정책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인플레이션 우려에 금리 인상을 준비하는 다른 주요국 중앙은행과 달리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초완화 통화 정책’을 유지하는 탓에 엔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펼쳤던 돈 풀기 행보를 거둬들이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 3일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 실시를 발표했다. 영국 영란은행도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지속해서 언급하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로이터=연합뉴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일본은행은 이런 흐름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제로금리를 유지하고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초완화 통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Fed의 테이퍼링 발표 직후인 지난 4일 “유럽·미국과 일본의 상황은 다르다”며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아타나시오스 밤바키디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외환 전략 이사는 “Fed는 내년에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크지만, 일본은행은 내년에도 제로금리에 머물러 있을 확률이 높다”며 “이러한 정책 차이로 인해 엔화가치는 올해 말 달러당 116엔까지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본은행이 통화완화 정책을 고수하는 건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 물가 때문이다. 미국(6.2%)과 유로존(4.1%), 한국(3.2%) 등 주요국 물가가 치솟고 있지만, 일본의 물가만 ‘나 홀로 0%’대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은행에 따르면 일본의 3분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다.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우려보다 디플레이션 탈출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는 이유다.

지난달 18일 일본 도쿄의 한 증권사 증시 전광판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18일 일본 도쿄의 한 증권사 증시 전광판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2일 구로다 총재와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장관은 일본은행과 정부가 2013년 발표한 "2% 물가상승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 방침을 유지하기로 했다. 구로다 총재는 지난 15일 “내년 상반기에야 물가상승률이 1%대로 올라갈 것”이라며 통화완화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엔화 가치 하락을 용인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구로다 총재는 “엔화 가치 하락은 수출제품의 가격 경쟁력과 일본 기업의 해외수익을 증가시킨다”며 “일본 경제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일본 물가도 글로벌 인플레이션 여파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국제유가 등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비용 부담을 못 이긴 일본 기업이 제품 가격을 인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10월 기업물가지수는 1년 전보다 8.0% 상승한 107.8을 기록했다. 오일 쇼크 여파가 이어지던 1981년 1월 이후 40년 9개월 만의 최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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