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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 빼앗긴 느낌"…'엄마 성 물려주기' 망설인 아빠의 반전

중앙일보

입력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가운데)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성본변경 청구인 가족(가운데)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엄마의 성·본 쓰기' 성본변경청구 허가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9일 오후 2시, 태어난 지 딱 180일 된 정원이가 서울가정법원 앞에 나타났다. 정원이는 태어나 170여일을 ‘정정원’으로 불렸다가 지난달 13일 성을 김씨로 바꿔도 된다는 허가를 법원으로부터 받았다. 정원이 부모가 법원 결정을 근거로 구청에서 후속 절차를 완료하면 정원이는 법적으로 ‘김정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엄마 성 물려주고 싶다” 생각한 부부

정원이의 아빠 정모씨와 엄마 김모씨는 지난 2013년 혼인신고 후 8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됐다. 혼인신고 당시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었지만, 점차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임신 후 부부는 엄마의 성(姓)과 본(本)을 아이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아빠 정씨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엄마 성을 물려주는 것을 망설였던 진짜 이유는 ‘내 것’을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자녀에게 아빠 성을 당연히 물려주고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왜 나만 못하는 걸까’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정씨의 속마음이었다.

그런 정씨가 생각을 바꾸게 된 건 임신·출산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다. 정씨는 “아내가 아이를 10달 동안 품고, 목숨 걸고 출산을 한 걸 생각하면 아빠인 나의 기여도가 미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성을 물려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게 미안해졌다”고 했다.

이혼 후 재혼하거나 법원 허가받거나

부부는 지난 5월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정원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먼저 8년 전 혼인신고 때 성·본 협의를 하지 않은 것이 발목을 잡았다. 민법 제 781조 1항은 자녀는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정한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할 때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어머니 것을 따를 수 있다.

정씨 부부처럼 혼인 중인 부부가 자녀의 성과 본을 바꾸려면 ①이혼 후 다시 혼인하며 혼인선고를 새로 해서 엄마 성을 따르기로 협의했다고 신고하거나 ②법원에 성본변경허가청구를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없었던 부부는 정원이가 태어난 뒤 법원에 성본변경허가청구를 하는 방법을 택했다.

법원에 접수되는 대부분의 성본변경허가청구는 이혼 가정 또는 재혼 가정에서 성을 변경하거나 양육 책임을 다하지 않은 아버지의 성을 바꾸는 청구가 대부분이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부부가 자녀의 성본변경허가 청구를 내는 경우 자체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부부의 청구를 대리한 신윤경 변호사는 “혼인 중 성본변경 청구도 드물지만 성평등을 청구 이유로 냈는데 받아들여진 것은 처음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2005년 호주제 폐지 이후 개정된 민법에 따라 2008년 자녀의 성이 ‘변씨’여서 놀림을 받는다는 이유로 어머니 성을 따르게 해달라는 아버지의 청구가 인용된 적 있다. 당시 법원은 ‘자녀의 복리’를 위해 성본변경을 허가한다고 밝혔다. 신 변호사는 이번 법원 결정을 환영한다면서도 구체적인 허가 이유를 법원이 명시해주지 않은 것에는 아쉬움을 표했다. 정씨 부부처럼 성평등을 이유로 법원에 청구를 낼 때 참고할 '사례'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성본 변경에 대한 대법원 판례가 중요하게 보는 부분은 ‘자녀의 복리’다. 판례는 자녀의 나이와 성숙도, 친권자ㆍ양육자의 의사를 고려하고 변경하지 않을 시 가족 사이 정서적 통합에 방해가 될 수 있는지, 변경한 경우 정체성 혼란 등 불이익이 있는지 등을 비교해 자녀의 행복과 이익에 도움이 되는쪽으로 판단하라고 정한다. 가사사건을 담당하는 한 판사는 “법원이 자녀의 복리 차원에서 ‘굳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편견·차별 예상되지만…당당히 맞서길”

정원이가 자라서 “왜 아빠와 성이 다르냐”는 주변의 시선을 받게될 것이 부부는 두렵지 않았을까. 엄마 김씨는 “편견과 차별이 예상되지만, 소송을 했고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정상 가정처럼 보이지 않을 것을 우려해 성본변경청구를 포기하는 것보다 성평등한 이름을 물려줌으로써 편견없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고 싶다는 희망이다. 만약 추후 정원이가 다시 성을 바꾸길 바란다면 법원 허가를 다시 구해야 한다. 국회에는 자녀의 성을 아버지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닌 부모 협의로 결정하게 하고, 그 협의 시기를 혼인신고가 아닌 출생신고 시로 바꾸는 민법 개정안이 3건 제출돼 있다.

부부는 ‘김정원’으로 살게 될 아이에게 각자 전하고픈 말을 준비해 왔다. 엄마 김씨는 “너의 이름은 무조건 아빠 성을 따라야 한다는 차별적인 조항을 없애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아빠 정씨는 “엄마 성을 쓰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해온 부성주의 원칙에 당당히 맞선 네가 편견과 차별에 맞서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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