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총재 샌드위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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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9일 어느 때보다 심란한 아침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콜 금리 목표치와 금리정책 방향을 정하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회의는 매달 열리는 금통위와 다소 다른 상황에서 열린다. 치솟는 집값을 안정시키면서 동시에 내리막길을 걷는 경기에 충격을 주지 않는, '솔로몬의 묘안' 같은 금리정책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청와대와 여당.재정경제부가 금리를 놓고 다른 주문을 하고 있어 이 총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집값 안정에 정권의 사활을 걸다시피 한 청와대는 노골적으로 금리 인상을 압박하는 듯한 모습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2일 외국인 투자 유치 보고회에서 "요즘 부동산 문제가 혹시 금융의 해이에서 발생한 것 아닌가 하고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한 데 이어 국정홍보처는 5일 국정브리핑을 통해 저금리가 부동산 과열의 주범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정부 주도의 부동산 정책이 먹혀들지 않자 이젠 금리라도 올려 해결해 보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보인다. 갈팡질팡하는 정책 혼선으로 신뢰를 다 잃어버린 정부로서는 고육지책인 셈이다.

6일 청와대 김수현 사회정책비서관의 전례 없는 한은 총재 면담 역시 '집값 안정을 위한 금리 인상 요구'가 주된 이유일 것이란 추측도 이래서 나온다. 김 비서관은 얼마 전까지 8.31 대책 등 부동산 대책을 담당했다. 또 최근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물의를 일으켰다. 이 같은 경력의 김 비서관이 불쑥 한은 총재 집무실을 찾아간 것 자체가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중앙은행 총재와 일개 비서관이 독대한다는 것은 '격(格)'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시중에선 청와대가 집값을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과시용 방문'이었다는 시각도 나온다.

하지만 여당과 경제 부처에선 정반대의 목소리가 나온다. 박병원 재정경제부 1차관은 7일 "부동산처럼 국지적 문제로 콜 금리를 올리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열린우리당 강봉균 정책위의장도 8일 "경기 상황에 비춰볼 때 금리 인상은 말이 안 된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총재를 비롯한 한은 금통위는 어떤 결정을 내려도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콜 금리를 올리면 '코드 금리'시비에 휘말리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경기를 더 나쁘게 만든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고, 안 올리자니 집값 불안에 대한 정권 차원의 책임을 엉뚱하게 뒤집어쓸 위험이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 총재가 김 비서관의 면담을 거절하거나 연기했다면 논란이 이처럼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청와대가 부동산 정책이 혹시 실패로 판정날 경우 그 책임을 한은에 떠넘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은도 이런 시나리오를 가장 우려한다. 그래서 시장에선 콜 금리는 현 수준을 유지하되 '부동산 시장 개입 가능성'을 구두로 강하게 언급하는 절충안이 나올 가능성을 유력하게 점치고 있다.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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