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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모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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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16세기 후반 러시아가 고급 상품인 모피를 얻기 위해 시베리아로 동진하던 무렵, 조선에서도 모피 열풍이 불었다. 그중에서도 초피(貂皮)라고 불린 담비 가죽은 특히 귀했다.

수요가 급증한 것은 성종 때부터다. 사치 풍조가 만연하면서 “부녀자들이 초피로 만든 옷이 없으면 그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중종반정에선 초피를 뇌물로 주고 공신에 임명된 사람이 있었고,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도 으레 초피를 요구했다.

역지사지삽화. 김회룡기자

역지사지삽화. 김회룡기자

귀한만큼 구하기는 어려웠다. 초피의 주요 산지는 함경도 깊은 산악지대로 당시엔 조선에 복속된 여진족(성저야인)들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이들에게 매년 일정량의 초피를 공물로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쌀과 콩 같은 식량을 하사했다. 16세기가 되자 이런 질서는 무너졌다. 초피 열풍이 불자 북쪽 변경의 지방 수령들은 초피 구하기에 혈안이 됐다. 초피는 재산 증축과 뇌물의 도구로 요긴했기 때문이다. 지방 수령들은 할당량 외에도 초피를 더 내놓으라며 성저야인들을 잡아 가두거나 헐값에 강매하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에 원한을 품게 됐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아신전’에서 아신이 아버지에게 “강 건너 우리 핏줄(여진족)에게 돌아가요. 힘들게 잡은 모피도 다 뺏기고, 언제까지 무시당하고 살 건데요”라고 애원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압박을 받은 것은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결국 농기구를 초피와 교환했고, 여진족은 철제 농기구를 녹여 무기로 만들었다. 조선은 욕심의 대가를 100년 후 호란에서 톡톡히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