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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아내와 공존 위한 궁여지책?…삼식이의 라면 요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27)

맞벌이하면서도 식사 준비는 당연히 아내가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얼마 전 아내의 부탁으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한 이후 차츰 요리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는 것이 노후를 무난하게 보내는 한 방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면은 인스턴트식품 중에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63년 선보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 처음 라면을 맛보았던 것 같다. 그때 먹었던 라면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 혀끝에서 감돌고 있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친구들과 생라면에 스프를 뿌려 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라면만 평생 먹고 살아도 더없이 좋을 것만 같았다.

1963 국내 최초로 생산된 삼양라면. [사진 조남대]

1963 국내 최초로 생산된 삼양라면. [사진 조남대]

1970년대만 하더라도 10∼20원 하던 라면값이 자장면이 500원 하던 1980년대에는 100원으로 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 겨울에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는 부근 식당에서 라면 한 그릇 주문해 싸늘히 식은 도시락밥을 말아먹으면 더없이 좋은 점심이었다. 거기다가 달걀까지 하나 넣으면 환상적인 식사였다.

어느 휴일 점심때가 되자 아내가 바쁘다며 라면을 좀 끓여 달라고 한다. 매일 아내가 해 주는 밥을 먹는데 라면쯤이야 어렵지 않아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겉봉에 있는 조리 방법대로 냄비에 물을 적당히 넣고 끓이면 되는 아주 간단한 요리다. 달걀을 풀고 파 한 줄기를 가위로 썰어 넣어 정성 들여 라면을 끓였다. 도중에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한 가닥을 먹어 본다. 아직 덜 익은 것 같아 뚜껑을 덮고 좀 더 기다린 후 제대로 익었는지 확인한 다음 그릇에 담아 내어놓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라면도 직접 끓여 아내에게 준다고 생각하니 왠지 신경이 쓰였다.

아내의 반응이 궁금해 살짝 눈치를 살폈다. 한 젓가락을 먹어 본 아내는 “아! 너무 맛있다. 라면 참 잘 끓이네요”라며 감탄한다. 어깨가 으쓱해지며 기분이 좋아진다. 맞벌이하면서도 요리라고는 라면도 한번 제대로 끓여보지 않았다. 퇴직 후 아내는 “누구 집 남편은 요리학원에 다닌다”, “어느 집 남편은 돈가스까지 집에서 만든다” 하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특별요리 한 가지를 개발해 보라며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그런 성화에도 불구하고 오직 라면 한 가지만 고수하며 버티고 있다.

라면 요리는 내가 쭉 해오다 어느 날은 바쁜 일이 있어 오랜만에 아내가 끓여주는 라면을 먹었다. 내가 조리한 라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동안 내가 해 주는 라면을 맛있다며 먹기에 아내는 라면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동안 썩 내키지 않았음에도 “잘한다”라거나 “맛있다”며 사기를 높이고 자존심을 살려 주면서 계속하도록 부추긴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따지거나 “당신이 더 잘하니 앞으로는 끓이지 않겠다”라고 하지 않고 모르는 척하면서 흔쾌히 끓여주려고 한다. 지금까지 아내가 해 주는 밥을 맛있게 먹으며 40여 년을 살아왔는데 아내의 조그만 기대와 희망까지 빼앗아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맛있게 할 수 있는지 고민도 해 보고, 아내의 바람대로 새롭고 특별한 메뉴를 개발해 기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끓는 물에 끓인 후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뺀 다음 육수와 얼음을 넣으면 시원하게 먹을 수 있다. [사진 조남대]

끓는 물에 끓인 후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뺀 다음 육수와 얼음을 넣으면 시원하게 먹을 수 있다. [사진 조남대]

끓는 물에 라면을 끓인 후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뺀 다음 스프를 넣고 비빈다. [사진 조남대]

끓는 물에 라면을 끓인 후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뺀 다음 스프를 넣고 비빈다. [사진 조남대]

여름철에는 비빔면이나 냉면을 사다 놓고 당신이 해 주는 것이 먹고 싶다고 애교를 부린다. “그것쯤이야 별거 아니지” 하며 생색을 낸다. 적혀있는 조리법대로 해도 먹을 만하다. 특히 냉면은 열무김치와 국물을 넣으면 훨씬 맛이 좋다. 골뱅이를 좋아해 얼마 전에는 골뱅이 비빔면을 개발했다. 비빔면을 삶아서 통조림의 골뱅이와 소스를 넣고 비비면 맛이 일품이다. 최근에는 열라면에 순두부를 넣은 순두부열라면도 만들어 보았다. 순두부가 들어가 별로 맵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단백질이 들어가 영양도 풍부한 한 끼 식사다. 라면에 콩나물, 버섯과 같은 갖가지 야채를 넣은 소위 야채라면은 국물이 시원해 색다른 맛을 낸다. 요리에도 창의력이 필요한 것 같아 점점 흥미가 느껴진다. 아내도 참 기발한 요리인 데다 맛도 일품이라며 좋아한다.

순두부열라면을 요리할 때 들어가는 순두부와 계란, 고추, 파 같은 야채. [사진 조남대]

순두부열라면을 요리할 때 들어가는 순두부와 계란, 고추, 파 같은 야채. [사진 조남대]

순두부와 계란, 고추, 파 같은 야채를 넣고 순두부열라면을 조리하는 모습. [사진 조남대]

순두부와 계란, 고추, 파 같은 야채를 넣고 순두부열라면을 조리하는 모습. [사진 조남대]

은퇴 후 사랑받는 남편이 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퇴직 후 삼식이가 되었지만 한 번도 푸대접받지 않은 것도 감지덕지한 데 가끔 라면 요리도 안 하겠다고 하다가는 진짜 구박받을 수도 있으니 꾹 참고 지내야겠다. 라면만은 내가 아내보다 더 잘한다고 으스대면서. 아내가 나의 기를 살려주어 나도 모르게 요리를 하나씩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노는 중생같이 점점 아내의 술수에 놀아나는 남편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 아내가 해 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지내왔다. 퇴직한 지금도 별 어려움이 없다. 앞으로 라면이나 간편식은 기쁜 마음으로 요리하려고 한다. 비록 아내의 요리보다 맛은 덜할지라도 정성스럽게 끓일 것이다. 이참에 새롭고 획기적인 요리를 개발해 볼까 한다. 그러면 아내의 반응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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