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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소형차 프라이드에 9명 타고간 어느 추석 귀성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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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25)

올 추석에도 코로나로 인해 고향에 가지 못했다. 예년에는 승용차로 새벽에 내려가 어머니와 형제, 조카 30여 명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보냈다. 거실 창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앉아 있자 귀성할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귀향하기 위한 시민들로 붐비는 1980 년대 서울역 풍경. [사진 한국철도공사]

귀향하기 위한 시민들로 붐비는 1980 년대 서울역 풍경. [사진 한국철도공사]

80년대 후반 추석에 고향 가려고 어렵게 열차표 두 장을 예매했다. 추석에 임박해 회사 당직이 발표되었는데 추석날 당직자 명단에 내 이름이 포함됐다. 여러 복잡한 상황으로 눈앞이 캄캄했다. 사무실에서 거의 막내인 입장에서 선배들에게 바꿔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아내와 아들만 보내기로 했다. 임신 7개월의 아내와 3살 아들을 바래다주려고 여유 있게 서울역으로 나갔다. 자가용이 드물고 기차가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라 서울역은 인산인해였다. 간신히 개찰구를 지나 승차장에 도착했지만, 우리 기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고향까지 가려면 다섯 시간도 더 걸렸다. 좌석이 없어 기차 연결 부분 세면기 옆에 신문지를 깔고 자리를 잡아 가기도 했다. 사진은 무궁화호 열차. [사진 조남대]

고향까지 가려면 다섯 시간도 더 걸렸다. 좌석이 없어 기차 연결 부분 세면기 옆에 신문지를 깔고 자리를 잡아 가기도 했다. 사진은 무궁화호 열차. [사진 조남대]

다음 출발하는 기차에 무조건 올랐다. 기차 연결 부분 세면기 옆에 신문지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고향까지 가려면 다섯 시간도 더 걸릴 것이다. 어린 아들과 아내를 바닥에 앉히고 짐을 옆에 놓은 채 내려오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찌 내가 그렇게 했는지, 또 아내는 무거운 몸인데도 못 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명절이 다가오면 아내는 지금도 30년이 더 지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무심한 남편이라고 핀잔을 준다.

귀향길에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사진 조남대]

귀향길에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사진 조남대]

그 이후 프라이드 승용차로 고향 갈 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우리 가족 4명과 동생네 식구 4명에 외삼촌까지 9명이 타고 갔다. 내가 운전하고 옆에는 외삼촌이 타고 뒷좌석에는 동생 내외와 아내가 아이들을 각자 한 명씩 무릎에 앉히고 탄 것이다. 무게로 인해 타이어가 쑥 들어갔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는 그런 일도 다반사였다. 고속도로는 정체가 심해 지도를 보면서 국도로 달렸다. 휴게소에 들러 가락국수 몇 그릇을 사서 집에서 준비해 온 김밥과 각종 간식으로 아침을 먹으면 소풍 온 기분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길이 밀려 샛길로 가는 앞차를 무심코 따라가다가 논둑 길로 가기도 했다. 한번은 앞차가 사잇길로 가자 지름길인 모양이라 생각하고 따라갔더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어느 집 마당에서 정차했다. 뒤차들도 마당 입구까지 따라갔는데, 그곳은 앞차의 자기 집이라는 것을 알고는 후진해 빠져나오느라 고생했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귀향길 도로변에 있는 사과 과수원. [사진 조남대]

귀향길 도로변에 있는 사과 과수원. [사진 조남대]

차창 밖 누렇게 익은 벼와 참새 쫓는 허수아비와 고개 숙인 수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오랜만에 만난 외삼촌과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힘든 줄 모르고 갈 수 있었다. 도로변 과수원에 들러 포도나 사과도 사고, 쉬엄쉬엄 가다 외갓집에 들러 외삼촌을 내려 드렸다. 외숙모는 조카들 왔다고 쌀과 대추와 마늘 등 농산물을 듬뿍 싸 주신다.

새벽 5시에 출발해 해가 뉘엿뉘엿할 때쯤 고향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는 30대의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한 세대가 흘러 육십 대 중반을 지나고 있으니 그 당시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갑자기 부모님이 생각난다.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 주셨던 자상한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신 지 20년이 지났다. 독자로 자라 항상 외로웠던 아버지는 슬하에 일곱 아들과 손주까지 31명의 자손을 두셨다. 북적거리는 명절이면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으며,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더 머물다 가기를 은근히 바라셨다.

코스모스 핀 황금 들판. [사진 조남대]

코스모스 핀 황금 들판. [사진 조남대]

정성껏 차례 준비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시던 어머니는 이제 요양병원에 누워 계신다. 2년 전 설날에 차례 지내고 찾아갔더니 자식과 손자들이 왔다고 손뼉 치며 환하게 웃으셨는데 코로나가 심해져 얼굴마저 뵐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화상통화로 근황을 확인해 볼 뿐이다. 음식을 삼키지 못하여 콧줄로 영양을 섭취하시는데, 어제는 답답하셨던지 자꾸 줄을 빼는 바람에 손을 묶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리 의료행위라고 하지만 어머니의 심정과 고통을 생각하자 눈물이 흐른다. 고생하지 않고 사시다 하늘나라로 가셔야 할 텐데. ‘인명은 재천’이라 하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에 만날 수도 없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교통여건이 많이 좋아졌지만, 명절에 고향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새벽에 출발하여 긴 시간이 걸렸지만, 부모님과 형제들 만날 생각에 힘들다거나 짜증 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특히 추석 때는 황금 들판과 예쁜 코스모스가 핀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소풍 가는 기분으로 달렸던 추억이 아련하다. 올해는 고향도 갈 수 없고 병실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도 뵐 수가 없어 가슴앓이만 하고 있을 뿐이다. 코로나 이전의 일상이 너무 소중하고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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